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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혈연관계나 돈을 매개로만 가능한 것일까 - 한겨레

[토요판] 조한진희의 잘 아플 권리
⑥ 함께하는 돌봄

사회화한 돌봄이 자본화 이어지며
소득에 따른 돌봄 불평등 현상으로

탈가족·탈시장화한 ‘건강두레’
피가 섞이지 않고 대가 없이도
아픈 사람 돌보는 사회적 연대

가족을 탈피한 돌봄이 시장으로 이동하면서 돌봄에서도 불평등이 심화할 수 있다. 시민들의 연대를 통한 정의로운 돌봄망이 형성돼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가족을 탈피한 돌봄이 시장으로 이동하면서 돌봄에서도 불평등이 심화할 수 있다. 시민들의 연대를 통한 정의로운 돌봄망이 형성돼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내 손으로 밥숟가락 뜰 수 있을 때까지만 살겠어.” 이어서 자기 손으로 밥을 떠먹지 못하는 상태는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는 말도 거침없이 한다.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오른다. 요양원에 누워 계신 여전히 반짝이는 눈빛의 다정한 친척 할머니, 애초 자신의 손으로 밥을 먹어 본 적 없는 중증장애가 있는 동료들. 그리고 질병으로 몸의 기능이 급격히 변화(상실) 중인 젊고 아픈 몸들도 생각난다. 물론 저 말은 ‘그런 몸’들을 혐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일 게다. 타인으로부터 적극적 돌봄을 받아야 하는 몸을 무기력과 수치감으로만 여기는 사회에서 그런 ‘수치스러운 몸’이 된다는 공포는 죽음보다 삶을 두렵게 만든다. 이런 혐오는 건강한 표준의 몸만을 올바른 몸으로 설정하는 건강중심사회의 필연일 뿐이고, 건강한 몸에 대한 찬양이 강할수록 아프고 나약한 몸에 대한 그림자가 짙어질 수밖에 없다. 조금도 새로울 게 없는 현실, 따라서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돌봄이 필요한 몸을 혐오하는 문화가 아니다.
‘돌봄 필요한 몸’ 혐오하는 사회
저 말이 문제적이라고 느꼈던 것은 7년 전이었다. 돌봄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동료가 돌봄의 중요성과 돌봄중심사회로의 전환을 강조하는 발표를 했었다. 그리고 그 동료가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제 손으로 밥숟가락 뜰 때까지만 살 거라면서 적극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몸에 대해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며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그날 저 말의 의미에 대해 동료와 늦은 시간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적극적 돌봄이 필요한 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어떻게 돌봄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겠으며 돌봄중심사회로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인간의 취약성이 보편이며 ‘정상’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취약성이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몸(적극적 돌봄이 필요한 몸)에 대해 혐오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사실 나 또한 저런 말이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에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동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극적 돌봄이 필요한 몸에 대한 우리의 이 복잡한 두려움은 도대체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최소한 우리가 ‘수치스러운 몸’이 됐을 때, 안정적이고 질 좋은 돌봄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신뢰가 필요하다. 그러나 동료와 나는 모두 빈곤층에 가까운 비혼여성이고, 돌봄의 시장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질 좋은 돌봄은커녕 최소한의 돌봄도 간당간당한 전망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주장해온 ‘돌봄의 사회화’가 ‘돌봄의 시장화’가 돼버린 비극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의 사회화가 일정 정도 시장화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돌봄의 사회화가 곧 시장화를 의미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돌봄의 사회화란 가족 안에서 ‘어머니’라는 ‘자연’이 ‘본성’에 따라 수행하는 헌신적 돌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의롭게 민주적으로 분배되고 상호작용하는 돌봄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 중장년 여성들의 저임금 고용으로 형성된 돌봄시장은 여성 내부를 더욱 위계화하고, 소득에 따른 돌봄 불평등을 낳았다. 결국 돌봄노동의 성별성은 사실상 거의 건드리지도 못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지금 시장화된 돌봄 현실에 대해, 사회가 돌봄노동자의 적정 임금과 노동환경에 개입하고, 요양보호사 파견업체처럼 난립한 시장의 문제도 일정 정도 공적 공급 방식으로 조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 돌봄의 사회화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자본주의에 조응하는 방식으로만 돌봄노동을 사고한다면, 일상을 단단히 받치는 정의로운 돌봄이 흐르는 사회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가족에서 시장으로 가지 않도록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가족에서 어렵게 나온 돌봄이 다시 시장에 갇히지 않는 돌봄이어야 한다. 즉 탈가족화된 돌봄이면서 탈시장적인 돌봄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의 상호성과 연대성에 기초한 돌봄 모델. 이를테면 내가 6~7년 전부터 주장하고 있는 형태는 건강두레(돌봄두레)다. 돌봄두레란 서로를 보살펴줄 수 있는 시민들의 공동 돌봄 모임이다. 병원을 함께 가기도 하고, 골절을 입은 다리의 회복 속도를 물어주고, 아픈데 혼자 지내는 게 괜찮은지 염려하고 대안을 함께 찾는 행위 등을 포함한다. 5년 전 건강두레에 대해 설명하며, 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건강두레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봄이 가능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보살핌을 제공하고, 그 과정을 통해 나·타인·우리라는 경계를 질문해볼 수 있다. 혈연이나 애정으로 엮인 관계가 아니라고 해서, 돈을 매개로 한 돌봄만 가능한 건 아님을 사회적으로 증명해볼 수도 있다. 사실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돌봄이 혈연이나 애정 관계 안에서만 이뤄져야 할 필연적·당위적 이유는 없다. 건강두레에 대한 실험은 ‘함께 돌보는 사회’라는 말을 현실로 만드는 데 하나의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상호돌봄 모델은 일부 마을 운동에서 실험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그 활동들은 ‘이웃을 가족처럼 돌본다’는 기치로 전업주부 혹은 중·장년층 여성들이 돌봄을 수행하고 주로 아이·노인 돌봄을 품앗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외에도 최근 서울시에서는 시간은행이라는 이름으로, 1인가구들 간의 상호나눔과 돌봄을 봉사활동을 기반으로 진행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게재된 자료가 많지 않아 자세히 검토할 수는 없었지만, 동일 지역 1인가구라는 공통점만으로 어떤 관계가 형성되고 돌봄이 가능할지, 그리고 그 돌봄이 다시 성별화되지는 않을지 우려스럽다. 돌봄의 성별성을 문제화하고 적절한 장치를 두지 않으면, 젠더 규범 재현과 강화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돌봄두레는 신자유주의가 원자화시킨 개인을 기존의 ‘가족 같은’ 관계로 ‘복원’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돌봄두레에 관심 갖는 이들에게 30·40대 1인가구 여성 혹은 비혼여성들을 중심으로 먼저 시작해보라고 제안한다. 다인가구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에서 돌봄에 취약해지기 쉬운 1인가구라는 특성, 상대적으로 돌봄에 대한 훈련이 돼 있을 가능성이 높은 여성이라는 조건 때문이다. 가족주의의 확장이나 돌봄의 성별성을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면서 시민 간의 상호 연대감에 기반한 돌봄을 시도하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돌봄을 실천하면서 적절히 돌보는 방법과 그 돌봄을 잘 수용하는 방법을 함께 공부해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시장에서 돌봄을 주고받는 자 사이에서는 맺어지기 어려운 다른 방식의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다. 민주적으로 순환되는 돌봄이 살아 있는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이를 통해 시장에서는 결코 생산되기 어려운 돌봄윤리를 형성해나갈 수도 있다. 돌봄은 어떤 관계와 방식에서 수행되느냐에 따라 가능한 한 피하고만 싶은 노동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만드는 윤리적 활동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가족처럼 일방적 돌봄의 의무가 강요된 현실에서의 돌봄은 고통이기 쉽다. 반면 돌봄두레처럼 자율적 개인들이 선호하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출입이 개방적인 관계에서의 돌봄은 상당히 다를 수 있고, 그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래서 돌봄두레가 시장화된 돌봄의 절대적 대안이냐면, 그렇지는 않다. 한국 사회에서 돌봄의 사회화가 정부 주도를 통해 시장화된 돌봄으로 나아갔다면, 이제는 정말 시민 주도로 탈가족·탈시장·탈국가적 돌봄 영역의 틈새를 만들고 확장하는 게 중요하다. 즉 돌봄에 대해 비시장적 질서를 구축하고 시장적 질서와 다른 ‘돌봄노동’의 생산과 분배 구조를 짜나가야 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상상력은 빈곤하다. 그렇다면 돌봄두레가 인간의 취약성을 정상으로 간주하며, 돌봄의 가치와 기쁨을 복원하고, 의존의 정의로운 관계망을 조직하는 실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원자화된 개인들이 시장화된 돌봄에 놓인 현실을 가로지르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여성, 평화, 장애 관련 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페미니스트. 국제 현장 연대 활동에서 건강이 손상된 뒤 투병 경험을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다. 공저로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비거닝> <포스트 코로나 사회>가 있다. 신생 단체 다른몸들에서 활동 중이다. 아픈 몸을 둘러싼 사회·경제·정치적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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