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설 <곁에 있다는 것> 출간을 앞둔 김중미 작가가 3월10일 오후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집에서 이번 작품과 관련해 가난, 공동체, 연대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 작가 부부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떠돌던 강아지 다섯마리, 고양이 여섯마리와 함께 산다. 강화/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내비게이션의 길 안내가 종료됐는데도 흙길에 나무만 무성하다. 이런 곳에 집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안고 비탈길을 오르자 단층주택 한채가 보인다. 소설가 김중미의 집이자 공부방이다. 지난 10일 만난 그는 마당에서 기르는 개 다섯마리를 차례로 어루만지며 이름과 특징을 소개했다. 집 안에는 고양이 여섯마리가 산다. ‘버려진 아이들’을 하나둘 거두다 보니 대식구가 됐다. 이곳 강화도 양도면으로 이주한 지 20년. 원래 농사를 지으려고 왔는데 ‘필요한 아이들’이 보여서 방 한칸에 청소년 공부방을 열었다. 그의 하루는 밤새 난리가 난 고양이 털을 치우는 것으로 시작하고,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아이들 숙제를 봐주는 것으로 끝난다. 인천의 ‘기찻길옆작은학교’도 짬짬이 오간다. 김중미를 세상에 알린 <괭이부리말 아이들>(1999) 이후 <조커와 나>(2013), <모두 깜언>(2015), <나의 동두천>(2018) 등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소설가, 활동가, 농부까지 직업이 여러개다. 쓰거나 쓰지 않는 삶. 쓸 때는 가난을 쓰고 쓰지 않을 때는 가난을 산다. 최근엔 소설 <곁에 있다는 것>을 펴냈다. 세명의 여성청소년을 중심으로 할머니, 어머니, 딸로 세대를 이어 대물림되는 가난과 여성 연대를 그렸다. 배경이 ‘은강’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지명과 같다. 그가 가난을 말하길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봄 햇살에 꾸벅꾸벅 조는 고양이 청중을 모시고 거실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 소설 <곁에 있다는 것> 출간을 앞둔 김중미 작가가 3월10일 오후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집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새 작품과 관련해 가난, 공동체, 연대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 작가 부부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떠돌던 강아지 다섯마리, 고양이 여섯마리와 함께 산다. 강화/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곁에 있다는 것>은 언제부터 준비하셨어요? “저희 공부방이 있는 곳이 재개발에서 밀려난 구도심이에요. 나이 든 원주민들이 돌아가시거나 떠나면서 공동화되자 구와 시에서 마을공동체 복원 같은 이유를 대면서 다른 도시처럼 구도심을 관광자원화 하고 싶어 했어요.” ―가난을 상품화하는 발상이 가난에 대한 무지에서 왔다고 보신 건가요? “그렇죠.” ―가난조차 쓸모가 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가난은 그냥 존재하는 거잖아요? 물론 구조적인 가난은 분명 벗어나야 하는 거고요.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이들이 싸워야 할 진짜 적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걸 볼 수 있는 건 당사자인데 사회가 ‘너네는 아무것도 아냐, 시키는 대로 해’라고 하죠. 이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면 짓밟죠. 이런 게 피해의식으로 있어요. 근데 이 사람들이 가난을 피하려야 피할 수 없어요. 존재 조건이에요. 그렇다면 무엇을 할까? 혼자선 못 싸우니까, 저는 당사자들이 자각을 하고 일어났을 때 변화한다고 생각해요.” ―<곁에 있다는 것>에서 여성이고 청소년인 지우랑 강이랑 여울이가 쪽방체험관을 막아서죠. 약자들의 주체성을 보여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또 여성서사가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데 페미니즘 시대의 반영인가요? “공부방을 시작한 초창기에 ‘기찻길옆작은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엄마들하고 매주 글쓰기를 했어요. 엄마들이 밤 열시, 열한시까지 잔업하고 집에 가시다가 공부방에 불 켜져 있으면 불쑥불쑥 와서 신세타령을 하셨죠. 또 할머니들이 늘 ‘여자들이 강해’, ‘남자들은 다 나자빠지는데 우리는 그 일을 다 했어’ 이런 얘길 하시고.”(웃음) ―소설에도 “가족이 그나마 굶지 않고 사는 것은 순전히 어머니와 딸들 덕분이었는데, 그런데도 집안을 이끌어갈 사람은 아들이라고 하니 황당했다” 이런 대목이 있어요. “엄마들한테 항상 들었던 얘기예요. 처음 야반도주하듯이 만석동에 와서 공장 다니시던 이야기들요. 그때부터 어머니들의 이야기에 관심은 많았죠. 엄마들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들 삶이 힘들잖아요.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데 섣불리 할 수가 없었어요.” ―요즘은 주식이나 부동산같이 부자 되는 법에 사람들 관심이 쏠려 있어서 가난을 꺼내는 게 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다 잘살아서 외면하는 건 아니잖아요.” ―두려워서 외면하죠. “모든 게 풍요로워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남들하고 똑같아져야 하고 이런 와중에 가난을 이야기하는 건 나의 비루함을 드러내는 일이죠. 불편할 수도 있는데 글 쓰는 사람은 말해야 할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계속 부여잡고 있게 되나 봐요.”
새 소설 <곁에 있다는 것> 출간을 앞둔 김중미 작가가 3월10일 오후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집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새 작품과 관련해 가난, 공동체, 연대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 작가 부부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떠돌던 강아지 다섯마리, 고양이 여섯마리와 함께 산다. 강화/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김중미는 생후 100일부터 동두천에서 자랐다. 분단의 모순이 모여드는 곳. 이웃 언니가 양공주가 되고 어느 날 사라진 친구는 미국으로 입양됐다. 수첩에 뜻도 모르고 ‘텍사스’, ‘늘봄’ 같은 클럽이나 술집 이름을 줄줄이 써가면 엄마한테 혼이 나곤 했다. 세상의 어둠을 예민하게 감지했고 사람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 깨우쳐준 곳, 그런 세상과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 데가 동두천이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식구들에게 책을 한권씩 사줬다. 방 안에는 전축 스피커가 매달려 있었다. 책과 음악 덕분에 부자로 산 적 없지만 가난도 느끼지 못했다. ‘나의 사회적인 가난’에 직면한 것은 태어난 인천으로 돌아와서다. 집 주변의 낡은 시립아파트 단지 너머 산동네까지 처연한 삶의 풍경이 열여덟살 중미의 눈에 서서히 들어찼다. 때마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는 알았다. 나도 난장이, 엄마, 아빠도 난장이구나. 약자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랐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대학병원 원무과에서도 마음 편히 일하지 못했다. 병원은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청소노동자 등으로 나뉜 촘촘한 계급사회였다. 낮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 오고, 밤이 되면 산동네 사람들이 응급실에 왔다. 열다섯살 노동자가 손이 잘려 실려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보다 공부 잘하는 동생 대학 보낼 때까지만 돈 벌고 나도 대학을 가겠다”는 계획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스물넷 나이에, 인천의 달동네, 그러나 그의 눈에는 판잣집조차 아름답게 보이던 만석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를 ‘은강’으로 이끌어준 귀인을 마주했다. ―조세희 선생님을 인천 공부방에서 만났다고 작가의 말에 쓰셨어요. 찾아오신 건가요? “아뇨. 우연히 만났어요. 그냥 쑥 올라오셨어요. 조세희 선생님이 아는 사진가가 난쏘공 쓸 때 취재하셨던 곳을 가보자고 해서 몇십년 만에 다니러 오신 건데, 당신이 지났던 그 길에 다른 동네들은 쇠락해가는데 여기는 막 애들 신발이 있고 애들 목소리가 들리니까 희한해서 올라오신 거죠.”(웃음) 조세희를 알아본 김중미가 반색하며 “고등학교 때 선생님 소설을 읽고 빈민운동을 하게 됐다”고 말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제가 몹쓸 짓을 했네요.”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그가 공부방에 몸담은 지 12년 만에 쓴 작품이다. 제4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에서 대상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 써본 소설이었다. 어려서부터 ‘미술할 아이’라는 말을 들었지 작가를 꿈꾼 적은 없었다. 글쓰기라곤 공부방에서 엄마들과 글쓰기 수업에서 일기를 쓴 게 전부였는데, 동두천에서부터 쌓이고 발효된 어떤 절박함이 그를 등 떠밀었다. “아이엠에프(IMF)를 거치면서 가난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는 게 너무 힘들었고, 화도 나고. 근데 뭐 할 게 없어서, 내가 쓰기라도 해야 돼, 하면서 갑자기 쓰게 됐어요.”
새 소설 <곁에 있다는 것> 출간을 앞둔 김중미 작가가 3월10일 오후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집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새 작품과 관련해 가난, 공동체, 연대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 작가 부부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떠돌던 강아지 다섯마리, 고양이 여섯마리와 함께 산다. 강화/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_______
‘난쏘공’ 읽고 33년째 공부방 운영
학교 문 닫은 상황에서 아이들 고립
‘공부방 불 켜져 있어야 맘 놓인다’
아이 얘기 듣고 떠날 수 없다 생각 “곁에 누구라도 있다면 달라지거든요
외롭지 않게 관계 놓지 않고 살았으면
청년들 죽음 너무 많아…오로지 살자”
그는 가난에 대해서 쓰지 않는다.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 본 것을 쓰는데 그게 항상 가난이다. “중앙에서 보면 안 보이고 가장자리에서 봐야 잘 보이”는 것들을 성실하게 실어 나른다. <곁에 있다는 것>도 그랬다. ‘이걸 써서 뭐 하나’ 계속 회의에 빠지는데 끝까지 쓸 수 있었던 건 어쩌면 팬데믹 때문인 거 같다고 했다. ―여기 강화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은 몇 명이에요? “우유를 여덟개 사면 다 없어지니까 여덟명이요.” ―만석동은요? “서른일곱명이요.” ―코로나 시국에 실제로 공부방도 아이들이 못 왔을 텐데요. “학교에 안 가면 애들이 일단은 먹는 게 안 돼요, 세끼 밥 중에 그나마 제대로 먹는 게 학교 급식이거든요. 그게 무너지면 애들이 편의점 음식에 더 길들여지죠.” ―돌봄 공백도 문제고 교육 양극화가 더 심해졌죠. 만석동은 어땠나요? “중산층 아이들은 이 팬데믹 상황에서 쓸데없이 학교 가서 낭비하지 않고 사교육 시킨다고 하죠. 주말이면 강화도 난리였거든요, 주차장이 캠핑장이 된 거예요. 근데 저희 애들은 더 혼자가 되고, 그래서 무기력해진 애들도 더 많아요. 엄마 아빠는 직장 갔다 와서 힘드니까 주무시면 얘네는 밤새 게임하고 아침에 못 일어나고요.” ―비대면 수업으로 아이들이 방치되는 문제도 심각하고요. 선생님은 집다운 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를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1988년쯤일 거예요. 어쩌다 저도 주말에 집에를 가는데 밖에서 놀던 애들이 뛰어오더니 ‘어디 가냐’고. ‘나도 엄마가 있어. 그래서 집에 가는 거야’라고 했어요. 그 아이가 그러는 거예요. ‘그럼 불을 켜놓고 가요. 우리가 보통 밤 10시까지 여기서 노는데, 공부방에 불이 켜져 있어야 맘이 놓이고 불이 꺼져 있으면 기분이 이상하다’고요. 여기 불 꺼놓으면 안 되겠구나. 아, 함부로 떠날 수 없는 거구나. 그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던 거 같아요.” 그때 “불 켜놓고 가야 기분이 좋다”고 했던 아이는 이제 마흔이 넘은 중년이 됐다. 가끔 큰이모 목소리를 듣고 싶다며 전화를 한다고. ―공부방을 졸업한 아이들이 몇 명이에요? “아, 저는 숫자로 하고 싶지 않아요.”(웃음) ―요즘 청년들 상황도 많이 어렵잖아요. “한 아이가 공부방을 졸업하고 대학에 갔는데 여러가지 문제로 이제 자긴 여기랑 안 맞는다고 해서 떠났어요. 그 친구가 작년 3월에 세상을 떠났죠. 그게 저한테는 결국은 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내가 여기 있는 게 맞아, 뭐 이런 생각도 좀 들었죠. 사실 팬데믹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더 빨리 안 갔을 수도 있죠. 그 친구가 더 고립이 됐으니까. 책임감도 느끼기도 하고 마음도 많이 아프고. 그 친구랑 연결된 다른 청년들을 살려야겠더라고요.”
새 소설 <곁에 있다는 것> 출간을 앞둔 김중미 작가가 3월10일 오후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집에서 함께 사는 개를 살펴보고 있다. 김 작가 부부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강아지 다섯마리, 고양이 여섯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강화/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사람과 사람 사이 거리를 두어야 하는 팬데믹 시대에 김중미가 내놓은 생존 키워드는 ‘곁’이다. 아니, 이전부터도 그랬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도 힘든 상황에 처한 아이가 주변 어른의 도움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낸다. 그런 결말이 좀 비현실적인 거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있으면 달라져요. 가족이 아니어도 곁에 사람이 있으면 달라지거든요. 전 그걸 믿기도 하고 또 실제 경험도 해요. 물론 아무리 마음을 쏟아부어도 제자리인 친구들도 있고 뒤로 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 친구가 계속 넘어져서 기어서라도 올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달라지죠.” 김중미 역시 곁의 수혜자다. 그는 <곁에 있다는 것>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33년 동안 나를 사람답게 지켜준 은강의 이웃들에게 감사하다.” ―사람답게 지켜준다는 게 어떤 뜻이에요? “공부방에서 엄마들하고 글쓰기를 시작한 일도 저를 지켜줬고요. 어떨 때는 도망가고 싶죠. 아우, 진짜 듣기 싫고 징징거리니까. 근데 그 가난한 현실이 제가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해주었던 것 같아요.” ―가난한 현실 때문에 도망가고 싶은데 현실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아이러니 같아요. “도망갈 데가 없잖아요.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죠. 안 보는 거지.”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는 게 인간다운 삶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릴 적 여름이면 골목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동네 아줌마들끼리 얘기를 하는데 다 힘든 삶을 사신 거죠. 근데 동화를 봐도 다 슬프잖아요. 몇 학년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제가 깨달은 세상은 인간은 다 슬픈 거예요.” ―선생님한테 지금 제일 슬픈 건 뭐예요? “며칠 전에 키우던 개 한마리가 세상을 떠났어요. 애들이 아파도 힘들고 저희 공부방도 힘들고. 저희 공동체가 열 가족 정도가 함께해요. 공동체도 세상 속에 있으니까 청년들이 겪는 문제 똑같고 여성들이 겪는 문제 똑같아요. 저희가 공동체로 살면서 보호됐던 것들이 흔들리면서 다 터져버리는 시간을 가졌어요. 근데 저는 원망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내가 선택을 한 거니까 무슨 탓을 할 수도 없고, 자책밖에 없고 되게 힘든 시간들을 보냈어요. 숨을 수 있었으니까 팬데믹이 되게 고마웠죠.” ―<곁에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어떻게 읽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굳이 할머니, 어머니, 딸까지 삼대(三代) 이야기를 했던 게, 내 아이를 혼자 키울 수 없는 것처럼, 나 혼자만 안전할 수도 없거든요. 지금의 나는 지난 시간들이 와 있는 거고, 물론 또 나도 흘러갈 거고요. 노동의 역사든 여성의 삶이든 내가 그냥 온전히 나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녹아 있는 시간들 있잖아요.” ―내가 조상의 역사를 다 지고 있다는 뜻인가요? “네. 그래서 때로는 나도 되게 지치고 힘든데, 아까도 말했던 공부방에서 만난 엄마들의 삶이 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사실 알바 안 하면 못 먹고사는 애들도 되게 많은데, 청소년 노동에 대해서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뭐 ‘물건 사려고 그래.’ 근데 그게 왜 얘네한테 중요한지. 아이들 안에서 들어가는 생각들은 사실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잖아요. 그걸 인정해주고 싶어요.” 매스컴에서 촛불집회에 나온 ‘의식 있는 요즘 청소년’에 주목한다면 김중미가 쓴 소설에는 편의점에서 알바하느라 촛불집회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아이가 나온다. 우리 사회에서 들리지 않는 가난한 청소년의 목소리를 살려낸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으세요? “여울이처럼 강단 있게 자기 걸 놓지 않고 가는 애도, 강이처럼 무른 애도 그렇고, 지우도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게 옳다. 그래도 충분히 아름답다, 괜찮다,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공부방에서 선생님과 연을 맺어왔던 친구들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외롭지 않게. 관계를 놓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 졸업생도 ‘이모, 우리 목표는 고독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얘길 했어요. 청년들 죽음…. 너무 많았어서. 오로지 죽지 않는 거. 그냥 살자. 제가 아예 대놓고 그랬어요. 우리 생존신고 하고 살자.” <끝>
※ ‘은유의 연결’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은유: 글 쓰는 사람. 글쓰기 수업도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을 펴냈다. 2005년부터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고 인터뷰를 해왔다. 성폭력 피해 여성, 국가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산재 노동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나고 기록했다. 사람을 살게 하는 말을 모으고 나누는 인터뷰를 해왔다.
_______
김중미를 만든 시간들
1969년 가난 속에서 예술을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고,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키워준 가족. 막내는 엄마 뱃속에 있었다.
1982년 고등학교 졸업 후 일했던 대학병원 원무과 수납 동료들과 함께. 이곳에서 우정과 자매애를 만나고, 한국 사회에 눈을 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던 초여름의 안면도 가족여행. 두 딸과 남편, 나를 살게 하는 무한 동력.
2017년 홍대 앞 공연장에서 연 기찻길옆작은학교의 스물일곱번째 공연 뒤 단체사진. 내 삶의 이유인 사람들.
2019년 공부방 졸업생의 결혼식에 가는 길에 경주에 들렀다. 공동체를 꾸려가는 동지이자 자매들인 후배들. 이들 덕분에 그 지난한 시간들을 넘고 견디고 또다시 봄을 맞는다.
0 Response to "“그냥 살자, 우리 '생존신고' 하고 살자”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