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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없던 캐릭터 - 한겨레

[토요판] 인터뷰
‘창의력은 천재성이 아니다’ 김하나 작가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개정판 발간
성추행 논란 고은 시인 부분은 빼고
주변부 약자들의 이야기 채워넣어

8년 동안 세상 바뀌고 시선도 변화
유명 카피라이터에서 전업작가로 변신
‘열심히 사는 여성 이야기’로 큰 호응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의 한 수제맥주 가게에서 자신의 데뷔작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의 개정판을 낸 김하나 작가가 기자와 건배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의 한 수제맥주 가게에서 자신의 데뷔작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의 개정판을 낸 김하나 작가가 기자와 건배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2019, 공저) <말하기를 말하기>(2020) 등으로 널리 알려진 에세이스트이자 독서 팟캐스트 진행자 김하나 작가가 2013년 낸 자신의 첫 책을 손질해 8년 만에 개정판을 냈다. 카피라이터로 일한 그의 첫 책은 ‘자기계발서’. 창의성을 깨우는 유연한 사고법을 술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녹였다. 나른한 월요일 오후, 유리 통창을 뚫고 햇볕이 쏟아진다. 노란 생맥주잔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빨간 하몽과 초록 루꼴라가 덮인 피자가 안주로 더해지자, 피맥(피자+맥주) 테이블은 삼원색 빛깔을 내뿜었다. 건배!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의 한 수제맥줏집에서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 김하나 작가(45)를 만났다. 그는 여러 해 유능한 카피라이터로 실력을 인정받으며 광고회사에서 일했다. 에스케이(SK)텔레콤 ‘현대생활백서’, ‘네이버-세상의 모든 지식’ 등 굵직한 광고에 카피를 썼고, 아시아의 젊은 광고인들이 실력을 겨루는 ‘아시아태평양 광고제’에 참가해 2006년 한국인 최초로 1등상인 영로터스 상을 받았다. 2013년 첫 책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창의성을 깨우는 열두 잔의 대화>(씨네21북스)를 내고 8년이 흘렀다. 지금 김 작가는 가장 인기 있는 국내 에세이스트 가운데 한명이 됐다. 인터넷서점 ‘예스24’의 팟캐스트 ‘책읽아웃-김하나의 측면돌파’ 진행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김 작가는 지난달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개정판(세개의소원)을 냈다. 이 책은 서울 종로 한 술집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아이디어 생산법’을 일러주는 교양서다. 주인공들은 비워지는 술잔만큼 깊어가는 사유의 맛을 즐긴다. 모두 열두 장으로 구성됐는데, 술 한잔이 비워질 때마다 하나의 장이 넘어간다. 책을 읽고 ‘창의적인 인터뷰’를 해보고자 그와 한낮 술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일부러 똘똘이 안경을 하나 샀어요. ‘두뇌 계발자’라는 콘셉트를 만들기 위해서요. 하하.” 평소와 달리 안경을 쓰고 온 김 작가가 말했다. 2017년 <힘 빼기의 기술>(시공사), 2019년 황선우 작가와 함께 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위즈덤하우스), 2020년 <말하기를 말하기>(콜라주) 등이 모두 큰 인기를 얻으며 그는 어느새 유명 에세이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첫 책은 뜻밖에 ‘자기계발서’였다. 김 작가는 이 책을 인문교양서로 생각하고 썼는데 처음엔 ‘두뇌계발서’로 분류돼 당황했다고 했다. “어쨌든 제가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가기 어려운 글을 쓰고 있어요.”(웃음)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는 ‘크로스오버’ 같은 느낌을 준다. 작가가 만약 “이렇게 생각하라”며 흔한 자기계발서 식의 설명을 했다면 책이 지닌 매력도 반감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철학서에 가깝다. 청소년 권장도서로 손꼽히는 유럽의 철학 입문서 <소피의 세계>와도 닮았다. 천재거나 요절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도 충분히 창의적일 수 있으며,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는 성실한 태도가 필요할 뿐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창의력’이란 거창한 말 대신 ‘아이디어’란 말을 쓰자는 제안도 담았다.
“인간 행동이 귀여워서 쓴 책”
“저기 저 그림 보이시죠?” 김 작가는 맥줏집 맞은편 복도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흰 바탕에 검은 선이 마구 뒤엉킨 추상화였다. “그땐 제 머릿속이 저 그림 같았어요. 어느 순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쉬지 않고 떠오르는 거죠.” 맥주잔 앞에서 김 작가는 8년 전, 첫 책을 쓰던 당시를 떠올렸다. 휘갈긴 추상화처럼 머릿속에서 뭔가 계속해서 태어나고 복잡해지던 때, 김 작가는 노트북을 열고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 가든, 무슨 책을 읽든, 머릿속에 소용돌이가 계속 범람해서 ‘아, 이걸 좀 꺼내놨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글을 써서 정리해나가기 시작했죠. 딱히 출판사랑 계약도 없이 그저 혼자요.” 그 시절 그는 세상이 바라볼수록 재밌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탁자 위에 깔린 종이 한 장도 허투루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금 맥주 테이블엔 종이 매트가 깔려 있다. 횟집이라면 어땠을까? 횟집에는 흔히 테이블 전체를 덮는 비닐이 깔려 있는데, 식사가 끝나면 자리를 손쉽게 정리할 수 있다. “그땐 이 이야기에 꽂혀 맥주잔 하나를 보더라도 ‘이게 얼마나 큰 아이디어인가’ 싶었어요. 잔에 기둥을 만들어서 손이 닿는 면적을 줄이고 술의 온도 변화를 적게 하는 것.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맥주잔이지만, 와인잔처럼 폼나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누군가 새로 한 것이죠. 누가 이렇게 만들 생각을 했을까, 가는 곳마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인간들이 하는 행동이 너무 다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던 거예요.” 책에선 광고회사에 다니는 30대 여성과 중성의 ‘나’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30대 여성은 말을 많이 하며 조금 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다. ‘나’는 주로 질문하는 위치에서 30대 여성의 답변을 듣고 이해하는 역할을 한다. 김 작가는 책에 등장하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내면에 실존하는 캐릭터라고 했다. “저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책에 등장하는 ‘나’와 비슷하게 주로 듣는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보수적인 면도 있고요. 하지만 동시에 광고회사에 다니며 창의성이 무엇인가 고민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제 안의 성향을 둘로 분리해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만들었어요.” 한 사람이 통째로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이기만 하진 않을 것이란 게 김 작가의 생각이다. 두 캐릭터가 서로 대화하는 구도를 설정해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여러 자아가 교류할 수 있도록 책을 구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에서 자신의 데뷔작 &lt;당신과 나의 아이디어&gt; 개정판에 대해 설명하는 김하나 작가. 이종근 선임기자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에서 자신의 데뷔작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개정판에 대해 설명하는 김하나 작가. 이종근 선임기자
작가로서 8년의 시간이 바꾼 것
첫 책이 나온 뒤 직업 카피라이터로서 사고의 유연함에 관해 쓴 책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김영사, 2015), <15도>(청림출판, 2017) 또한 출판계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대중적 인기를 얻진 못했다. 김 작가의 책이 큰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한 건 2017년 작 에세이 <힘 빼기의 기술>부터다. “그때 ‘에세이가 읽기 쉽고 재미있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책의 의미도 더 생기는 것 같다는 깨달음이 생겼어요. ‘그동안 글쓰기에 너무 힘을 주고 있었구나, 좀 더 유연하고 편안한 글을 써야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그 뒤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와 <말하기를 말하기>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죠.”
예전 책을 열어보는 게 부끄러웠다는 김 작가는 막상 개정판을 쓰려고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를 다시 읽고는 자신의 첫 책이 마음에 쏙 들었다고 했다. “내가 예전에 엄청 뻣뻣한 책을 썼겠거니 싶어서 첫 책을 못 열어봤어요. 그런데 사실 저의 취향 저격 책이었던 거예요. 나름대로 ‘난 이걸 꼭 써야겠어’라는 막 이상한 사명감을 갖고 썼던 것이라 다시 읽어보니 되게 재밌더라고요.” 개정판을 낸 건 8년 사이 세상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성추행 논란이 있었던 고은 시인의 글이 초판에 등장하는데, 김 작가는 이것을 도려내기로 몇년 전부터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다 ‘그것만 삭제한다고 될 일인가’ 싶어, 한 장을 통째로 빼고, 한 장을 새로 써넣었다. “고은 시인의 ‘엽기적 행각’을 듣고 내가 이 시인의 작품을 인용했다는 게 너무 기분 나빴어요. 개정판을 내면 이걸 고쳐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만의 문제가 아니죠. 남성 중심의 오랜 역사가 시 한 구절 도려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개정판을 내며 다시 쓴 열한번째 장 ‘숲의 그늘진 곳’은 지금까지 우리가 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세계적으로 거의 백인 남성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권력을 키워온 사람들은 견고한 숲을 만들어왔다. 숲의 그늘진 곳에 조그맣게 자라온 수많은 것들이 있고, 이들을 조명해줄 때가 지금이라는 사실을 김 작가는 강조했다.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있던 것들을 좀 더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아픈 이, 어린이 같은 약자들의 힘겨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건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배려가 아닌 의무라는 것이다. 김 작가는 “개정판이 나오기까지 지난 8년 동안 제가 가장 많이 변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즐겁게, 잘 사는 여성 이야기 쓰고파
“제가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드는 데 성공한 건가요?” 그에게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없던 캐릭터 같다’고 하자 돌아온 답이다. 1976년생인 김 작가는 20~30대에 이미 자기 영역에서 최고의 반열에 올랐고,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조립식 가족’을 만들어 살며, 낮은 목소리로 선명하게 말하는 중성적 매력을 가졌다. 한편으론 편안한 동네 언니 같은 포용성과 부드러움도 지녔다. 그가 대중들한테 사랑받는 직업작가가 된 것도 이처럼 열린 삶의 방식과 태도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 아닐까? 그의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출간 2년 동안 4만5천부가 팔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꾸려진 혈연 중심의 이른바 ‘정상가족’ 이야기가 아닌, 새롭고 다양한 가족에 관한 책들이 최근 몇년간 다수 출간되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 책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여자 둘과 고양이 넷의 동거기가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시콜콜한 생활 이야기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출간된 일본어판도 한달 사이 1만부가 팔려 최근 2쇄를 결정했다. 지난 3월엔 대만에서 책이 출간됐고, 최근엔 중국 수출이 확정됐다. “주위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 40대 여성들이 정말 많아요. 이들 상당수는 자기 이름 대신 ‘누구 엄마’라든가 ‘경력단절여성’으로만 불려요. 눈에 보이는 이들이 별로 없었죠. 평범하게 자기 일 열심히 하는 40대 여성들의 이야기는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게 힘겨운 싸움으로만 보이지 않게,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이야기를 썼더니 반응이 크게 돌아왔습니다.” 그는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에서 직업작가가 된 지금의 모습이 원래 의도하거나, 계획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처음부터 ‘작가가 되겠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책을 내고 일이 잘 풀렸다”며 “절반은 우연, 절반은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 쓸 것인가 고심했던 결과”라고 했다. 얼마 전 김 작가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힘 빼기의 기술>에서 ‘나의 국어 경찰 아버지’란 글을 첫 장에 쓸 정도로 김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고, 삶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5년 뒤엔 김 작가도 50대가 된다. 그는 50대엔 책을 조금 덜 쓰고, 대신 느슨한 개념의 학교 같은 공간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황선우 작가와 함께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 이층집을 마련해 1층은 교류 공간, 2층은 개인 공간으로 쓰겠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책읽아웃’에 출연한 여성 작가들과 느슨한 연대의 형태로 ‘단군 이래 가장 큰 여성 작가 모임’을 만들었다. 언젠가 이름처럼 진짜 단군 이래 가장 큰 여성 작가들의 커뮤니티를 운영하게 될 수도 있다. “앞으로 <여자 둘이 일하고 있습니다>, <여자 둘이 먹고 있습니다>, <여자 둘이 여행하고 있습니다> 같은 글을 계속 써나가는 게 소망”이라고 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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