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비평
민주당의 페미니즘 탓하기
20대 남성 국민의힘 압도적인 지지
패배 분석 자체가 남성권력 본모습
군가산점·징병제 주장도 거침없어
안희정·오거돈·박원순 권력형 성폭력
민주당 깊은 반성 대신 페미니즘 탓
정의당 박창진 ‘대표 성추행’ 잊어
여성 고통 정치화할 때 항상 ‘역공’
인종차별을 ‘흑백갈등’으로 부르듯
‘젠더갈등’이라며 성차별 진실 은폐
‘386세대’라는 호명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던 2000년대 초, 이 세대에 대한 담론은 거의 남성 중심이었다. 2000년 4월20일, 386세대 당선자들이 손을 잡고 정치개혁에 앞장서겠다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부겸(당시 한나라당) 김성호(민주) 오세훈(한나라) 임종석(민주) 원희룡(한나라) 장성민(민주) 당선자. <한겨레> 자료사진
▶ 4·7 재보궐선거 뒤 선거 패배를 놓고 여당이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은 ‘이남자’로 일컬어지는 20대 남성의 군복무 문제다. 더불어민주당의 젊은 남성 정치인들은 모병제 전환 및 여성도 군복무를 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연일 띄운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2년 전 위헌 결정이 난 군가산점 재도입까지 꺼내 젠더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았다. 기가 막힌 전개다. 성추행으로 시작된 보궐선거가 성차별로 마무리되려 한다. 보궐선거가 끝난 후 정치권은 온통 20대 남성이 압도적으로 국민의힘에 투표한 것을 두고 분석하기 바쁘다. 20대 남성을 분석하려는 이 움직임 자체가 남성권력을 보여준다. 분석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 방향은 참으로 문제적이다. 여성의 노동권을 침해한 중년 남성의 권력형 성폭력으로 발생한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후, 이 중년 남성들은 되레 여성 탓을 한다. 선거에서 패한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 엉뚱하게도 군가산점제를 부활시키겠다는 목소리가 슬슬 나오고 어느새 담론은 모병제-징병제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다.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자신들이 소망하는 가상의 원인을 발명해내는 중이다.
왜 서울과 부산에서 보궐선거를 했는가. 이 질문은 민주당이 가장 회피한 질문이다. “보궐선거 왜 하죠?”라는 질문은 심지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판단했다. 이 질문은 민주당에 의해 정치적으로 회피되었고 선관위에 의해 제도적으로 봉쇄되었다. 가장 물어야 할 질문을 그렇게 가둬놓은 채 선거를 치르더니 이제는 진심으로 문제를 망각한 듯 보인다. 그렇기에 묻는다. 보궐선거 왜 했는가. 이 질문을 회피하는 한 민주당은 결코 진짜 문제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안희정-오거돈-박원순으로 이어지는 권력형 성폭력에 대해 민주당은 단 한번도 제대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더 나쁜’ 집단의 존재는 오히려 그들이 마음 놓고 뻔뻔해지게 만들어주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권력형 성폭력으로 지자체장이 현재 수감되어 있거나, 재판을 기다리거나, 법적 판결을 회피하는 최악의 선택을 해왔다. 그로 인해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보궐선거를 치렀고 민주당이 선거에서 크게 졌다. 그런데 선거 후에 페미니즘 탓을 한다. 정의당 박창진 부대표까지 나서서 “특정 성별을 우대하는 조치” 운운하며 마치 이 정부와 여당이 여성을 대단히 우대씩이나 해서 민주당이 선거에서 진 것처럼 교묘하게 말한다. 정의당은 왜 이번에 보궐선거에서 후보를 내지 않았는지, 왜 당대표를 새로 뽑았는지 역시 망각한 모양이다. 정의당 대표였던 김종철의 성추행 때문이었다. 부동산 문제, 조국 사태, 검찰개혁 과정에서 벌어진 각종 갈등, 끝이 보이지 않는 권력형 성폭력과 난무하는 2차 가해 등의 문제들은 간단히 ‘페미니즘 탓’으로 떠넘긴다. 증오를 자양분 삼아 사회의 진짜 문제들을 가리는 가장 나쁜 방향으로 간다. 원인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원망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을 찾아 원인을 뒤집어씌운다. 20대가 역사적 경험치가 낮은 것이 아니라, 지금 정치인들이 현상 파악을 게을리하는 것이다. 여성의 고통을 정치화할 때 항상 역공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문제는 남성 역차별이 아니라 남성들의 역공이다. 여성들은 일상을 위협하는 여성 대상 범죄를 정치적 의제로 올려놓으려 애썼다. 그러자 여성 대상 범죄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이 범죄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 여성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취업 성차별과 여성 대상 범죄처럼 명백한 사회적 문제에 목소리 내는 게 ‘여성 편향’이라고 말한다면, 특권을 폭력적으로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2017년 2월16일 ‘성평등 공약’을 발표하며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당시 이 선언을 듣고 우려와 반가움이 교차했다. 그야말로 ‘영혼 없는’ 선언은 안 하느니만 못한 역효과를 만든다. 그런 점에서 우려했으나, 그래도 말이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부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이 선언은 긍정적인 면보다는 역효과를 낳았다. 성평등 정책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으면서 허황된 인상만 남겼다. 여성들의 삶은 나아진 게 없는데 한쪽에서는 여성 편향적, 여성 친화적, 페미 정부 등의 어처구니없는 말들만 넘쳐난다. 실제로는 성평등 정부라서가 아니라, 성평등을 내팽개쳐서 문제였다.
국민의힘 이준석 전 최고위원은 앞장서서 과감히 여성을 무시하는 전략을 통해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를 회피하고, 20대 남성의 박탈감을 들어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중년 남성들의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한다. 20대 남성이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20대 중후반 남성들은 인생에서 잠깐 여성과 경쟁하는 구도에 놓이지만, 30대 이후에는 여성들 다수가 ‘퇴출’되는 상황을 맞는다. 20대 남성을 파고드는 온갖 정치적 발언들은 바로 여성이 ‘퇴출’되기 전 시기에 집중하여 20대 남성이 ‘여성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것처럼 꾸며낸다. 실제로 20대의 저임금 일자리, 불안한 주거, 학비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보다 여성을 미워하는 힘을 동력으로 삼아 20대 남성이 하나의 세대로 뭉치도록 자극한다. 이런 전략은 20대 남성이 겪는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가상의 위안을 준다. 20대라는 세대 안에서 이분법적으로 성을 분리한 후, 세대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계층 문제는 아주 손쉽게 가린다. 174석을 가진 민주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임하는 미적지근한 태도에서 보여주었듯이, 정작 20대 남성이었던 김용균 같은 노동자를 결코 대변하지 않았다. 진짜 이 사회의 문제를 들춰낼 사안 앞에서 침묵한 채 ‘여성’이라는 집단을 정치적 제물로 던져버린다. 문재인 정권 내내 꾸준히 20대 남성 지지율은 화두에 올랐다. 2019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서도 20대 남성의 낮은 정권 지지율 원인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렸다. 20대 여성을 “개인주의, 페미니즘 등의 가치로 무장한 새로운 ‘집단이기주의’ 감성의 진보집단”으로 규정지었다. 여야가 모두 젊은 남성의 마음을 두고 경합하는 동안 누구의 삶이 위태로워지고 있는가. 20대 여성 자살률이 상승했고 지난해 여성 실업률이 남성을 앞질렀다. 남성이 여성보다 두배의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왜 남성의 ‘표심’을 잡겠다고 적극적으로 퇴행하는 전략을 쓸까. 계승시켜야 할 미래의 정치적 주체는 언제나 ‘젊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남자에게 인정받으려 한다. 선거 참패보다 남성권력의 상실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여성 유권자의 표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총선이나 대선보다 20대 여성도 민주당에서 이탈했다는 사실, 20대 여성 15.1%가 소수정당에 투표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분석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여성은 그들에게 결코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은 남성에게 세습되어야 한다. 장혜영, 류호정, 용혜인 등 젊은 여성 정치인을 무시하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들 중에 민주당 지지자 중년 남성들이 많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진보의 역사 한복판에 언제나 우상호가 있었다. 민주당의 굴곡과 승리의 역사가 우상호의 역사”라고 말하는 우상호의 목소리는 과거의 경력으로 현재의 권력을 점유한 특정 세력 남성들의 마음이다. 이들은 선거에 지더라도 ‘우리 편은 옳다’는 생각을 지키려 한다. 세상이 나빠지더라도 내 편은 뭉쳐야 한다. 선거 기간 “박원순이 우상호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는 마음가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우상호와 곳곳에서 박원순의 ‘향기’를 맡는다는 임종석의 태도에서 보았듯이, 시대착오적이고 무지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86세력 중심의 남성권력을 악착같이 지키려 했다. ‘386세대’라는 호명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던 2000년대 초, 이 세대에 대한 담론은 거의 남성 중심이었으나 드물게 386세대 여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 한 패션 정보 업체에서 강남 지역 상권을 중심으로 당시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다. 정치 주체로 호명되지 않는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은 그들이 소비자일 때다.
‘남성’이 정치 주체가 되어 대표하는 정치가 언제나 보편으로 여겨졌다. 여성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인권 또한 기약 없이 ‘나중에’로 미뤄졌다. 차별금지법은 표류 중이다.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그로 인해 벌어진 필연적인 결과다. 진정한 의미의 성평등 정부였다면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계속 군인으로 살고자 했으며 실제로 군인으로서 출중한 능력을 이미 보여준 인물이었다. 변희수 하사의 강제 전역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부는 소극적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개입자였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준다. 남성만 군대에 가는 건 억울하다고 하지만 트랜스 여성의 군복무에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능력과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을 말하지만 남성이 여성이 되었을 때 그 능력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공정이라는 담론의 실체가 특정 정체성의 자장 안에서 돌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성애 남성은 보편적 인간이기에 이들의 정치는 ‘정체성 정치’라 불리지 않는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고 싶다면 20대 여성의 15.1%가 왜 거대 양당에서 벗어났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이 겪는 살인, 강간, 불법촬영 등에 대한 공포가 적극적으로 정치화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젊은 여성들은 이를 정치화하는 집단에 표를 던졌다. 손정우는 아동성착취물 유통으로 44억원을 벌었다고 알려졌다. 많은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는 ‘음란물’이라는 이름으로 ‘0원’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44억원과 0원은 극단적인 숫자이지만, 이러한 극단 사이에서 누군가는 매우 현실적으로 공포를 느낀다. 여성의 목소리를 묵살해서 남성의 비위를 맞추는 정치가 계속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소수정당과 무소속 후보 중 성평등과 관련된 후보가 5명이었다. 여성과 소수자를 지배하는 남성 대표자가 아니라, 직접 여성과 소수자를 대표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유독 많은 선거였다. 이제는 기존 정당에 ‘들어가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는 한계가 명백하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성의 얼굴을 한 권력 주변에서 여성 정치인들이 ‘피해호소인’을 만들며 눈치 보는 태도는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했다. 중년 남성끼리 모여서 아무리 비상대책을 강구한들, 묘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비상’은 그들 권력의 비상이기 때문이다. ‘20대 남성’은 86세력 남성들의 문제를 가리기 위한 허구의 호명이다. 기득권 남성들은 여전히 해석하는 위치를 점유하고 정치적 후계자가 될 남성을 꾸짖거나 비위를 맞춘다. 선거에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성권력은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20대 남성’에 대한 선거 분석은 왜 권력형 성폭력이 줄줄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직장 내 성폭력은 표면상으로는 한명의 행동이지만 실제로는 조직적이다. ‘젠더 갈등’은 없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흑백갈등’이라 부르며 인종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한 후 가상의 권력 대결을 만드는 언어처럼, ‘젠더 갈등’은 성차별을 은폐하는 권력의 언어다. ‘흑백갈등’이라는 가짜 전선은 백인의 권력을 축소하고 흑인의 고통을 최소화하며 아시아인을 투명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성과 남성을 중심으로 한 ‘젠더 갈등’이라는 구도는 진실을 회피한다. 가상의 적대를 통해 기득권 남성들은 계속 자리를 유지한다. 그리고 수많은 고통들이 투명해진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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