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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행복하길”…정진석 추기경의 마지막 기도 - 한겨레

탁월한 행정가이자 저술가 정 추기경의 삶
정진석 추기경. 서울대교구 제공
정진석 추기경. 서울대교구 제공
정진석 추기경이 27일 태어난 지 90년, 사제로 서품된 지 60년 만에 선종했다. 김수환 추기경(1922~2009)에 이은 한국 가톨릭의 두 번째 추기경인 그는, 전임 김수환 추기경에 견줘 대중적인 활동보다는 주로 행정가와 저술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을 하던 중인 1998년 대주교가 되면서 김수환 추기경이 맡았던 서울대교구장을 맡았고, 2006년 교황 베네딕토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됐다. 2012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신학대학)에서 지냈다. 정 추기경의 삶에는 한국 현대사의 짙은 명암이 배어 있다. 부친 정원모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공산청년부 조직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후 1937년부터 동아일보 도문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부친은 광복 후 월북해 북한 정부에서 차관급에 해당하는 공업성 부상을 지내다가 숙청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 추기경은 1950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으나, 그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중퇴한 이후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의 길을 걸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흑역사로 기록된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숨진 수많은 주검을 보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정진석 추기경 취임 감사 미사. 서울대교구장 제공
2006년 정진석 추기경 취임 감사 미사. 서울대교구장 제공
1968년 이탈리아 로마 성 우르바노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 2년 뒤 교회법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귀국한 뒤 불과 39살 나이에 천주교 청주교구의 제2대 교구장 주교가 됐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연소 주교 서품 기록이다. 그는 28년 동안 청주교구장을 지내다 1998년부터 14년간 서울교구장을 지냈다. 그러면서 교회 내에서 남다른 경영 수완을 보였다. 서울교구장 시절, 부자 동네 성당에서 근무하느냐, 가난한 동네 성당에서 근무하느냐, 교구 소속 병원이나 방송국에서 근무하느냐에 따라 신부들 간에도 급여 등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는, 미사 예물 공유 제도를 실행해 일단 모든 예물을 교구에 보낸 뒤 일괄적으로 균등하게 배분하도록 했다. 그 뒤 이 제도는 한국 가톨릭 전 교구로 확산됐다. 하지만 교구 살림을 불리는 과정에서 잡음도 적지 않았다. 명동성당과 교구청 건물의 재개발 및 신축을 주도하면서 잡음이 일기도 했고, 태릉성당에 납골 시설을 조성하면서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기도 했다. 청주교구장 시절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꽃동네 관련 후원금으로 사재 15억원을 내놓은 것을 두고도 성직자로서 거금을 축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995년 12월 정진석 당시 대주교의 주교 서임 25주년 감사 미사. 정 대주교의 오른쪽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서울대교구 제공
1995년 12월 정진석 당시 대주교의 주교 서임 25주년 감사 미사. 정 대주교의 오른쪽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서울대교구 제공
정 추기경은 전임 김수환 추기경이 독재정권에 대항해 양심의 소리를 낸 것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청주교구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으로 전두환 군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가톨릭 신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족들로부터 봉성체를 여러 차례 요청받았으나, 모두 거절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 폭로를 도운 전종훈 신부에게는 인사 불이익 조처를 내렸다. 2010년 12월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에 대한 천주교 주교회의의 입장과 상반되게 옹호 주장을 언론에 표명했다가 교계 내의 반발을 샀다. 당시 원로사제 25명이 교구장직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정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 내 최다 저술가로도 꼽힌다. 교회법 전문가인 그는 신학생 시절부터 50권이 넘는 저서들을 번역·출간했다. 건강이 악화한 지난해에도 2권의 책을 냈다. 정 추기경은 지난달 22일 병실을 찾은 서울대교구장 후임인 염수정 추기경 등에게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은데, 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하자. 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한다”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더욱 더 하느님께 다가가야 한다. 모든 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는 “(정 추기경이) 25일 통장 잔액을 모두 필요한 곳에 봉헌하셨다. 당신의 삶을 정리하는 차원에서인지 몇 곳을 직접 지정해 도와주도록 했다”며 “나머지 얼마간의 돈은 고생한 의료진과 간호사들, 봉사자들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허 신부는 “당신의 장례비를 남기겠다고 하셔서, 모든 사제가 평생 일한 교구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그건 안 된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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