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이명박 정부는 원전 안전개선 대책을 수립했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이 폭발한 지 2개월 만이었다. 이주호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하더라도 원전이 안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5년간 1조원 규모의 재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후쿠시마 원전사고(2011년 3월 11일) 이후 딱 10년이 지났다. 사고 10년을 이틀 앞둔 지난 3월 9일, 한국수력원자력은 국내 원전 후속대책 56개 중 54개가 완료됐다고 발표했다. 이행률 96.4%다. 1조 1000억원 규모의 재원을 투입하겠다고 한 정부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예산과 주요 항목을 살펴봤다.
2013년 파괴된 후쿠시마 원전을 조사 중인 IAEA 관계자들 /IAEA 제공
■1조1000억원에서 줄고 줄어 4500억원으로
경향신문이 입수한 한수원의 ‘세부 추진 과제별 편성 예산 및 집행금액 내역’에 따르면 2월 23일 기준 예산 계획은 4542억원이고, 이중 4431억원을 집행한 것으로 돼 있다.
이는 지난해 10월 계획보다 준 금액이다. 한수원이 지난해 전혜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예산 계획은 6070억원이다. 5년간 1조 10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절반도 투입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한수원은 예산을 절감했다는 입장이다. 예상보다 낮은 금액으로 용역 계약을 했고, 추가조사 결과에 따라 불필요한 과제를 없애거나 줄였으며, 대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불필요한 예산을 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좋게만 보기는 어렵다. 일본과 한국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만, 참고하자면 일본의 경우 2020년 7월 기준으로 안전대책 비용은 5조 2376억엔(54조 8000억원)으로 한국의 100배가 넘는다. 일본의 원전 안전 비용은 계속 증가해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출신의 한 원자력공학자는 이를 언급하며 “일본은 1개 호기에 2조원가량을 썼는데 우리는 전체 원전에 1조1000억원을 잡았으니 금액이 과도하게 잡히지는 않았다”며 “그중에 40%밖에 못 쓴 것은 대책을 허겁지겁 대충 세워 돈을 쓸 데가 없었던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당시 정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대책을 내놨다고 홍보했지만 ‘졸속’ 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안전대책이라는 게 그렇게 빨리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안전대책을 발표했을 때, 세계 곳곳의 원전들은 ‘진단’ 과정에 머물고 있었다.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장기적으로 점검한 다음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월성 2~4호기 설계에 참여한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는 ”고작 전문가 40~50명 정도가 점검을 한 다음에 1조원대의 대책이 나왔다“며 비판했다.
■수소제거 장치가 아니라 수소점화 장치?
4431억원을 들여 이미 완료된 사업은 어떨까. 한수원이 완료했다고 한 후속대책 54개 중에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된 피동형 수소제거 설비(PAR)를 보자. 수소는 공기 중 농도 4%만 넘어가도 폭발 가능성이 있다. 후쿠시마 사고 규모가 커진 가장 큰 이유도 수소 폭발이었다. 이 설비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수소를 제거하는 장치다.
그런데 이 설비는 초반인 2013년부터 논란이 일었다. 기기검증을 진행한 한국기계연구원이 실험 중 안전사고를 우려해 2시간 만에 수소 주입을 중단하고 ‘부적합’ 의견을 냈으나, 산업기술시험원은 보고서에 ‘적합’ ‘허용기준 만족’이라고 썼다. 시험 결과를 조작한 것이다. 그리고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기술원은 이 보고서를 채택했다.
최근에는 이 장치의 성능이 규격의 30~60%에 불과하고 오히려 화재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한수원이 알고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정윤 대표는 ”수소제거 장치가 아니라 수소점화 장치를 갖다놓은 셈“이라며 ”규제기관에서 어떻게 이런 설비를 통과시켜줬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를 ‘완료’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한수원은 ”후쿠시마 후속대책의 모든 과제는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엄격한 규제 검증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적합’ 판단한 경우 공식적으로 종결되므로, 일부 제기된 논란에 근거해 완료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수소폭발이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인공위성 사진 /AP연합뉴스
■1000억원 썼는데, 변경된 대책
또 다른 주요 대책인 ‘격납건물 배기·감암설비(CFVS)’는 1000억원을 고스란히 ‘날릴’ 위기다. 예산 집행내역에 따르면 한수원은 해당 설비와 관련해 1040억원을 사용했다. 애초 이 사업 계획 예산은 3307억원이었고, 지난해 10월 예산 계획에는 2650억원으로 잡혀 있었다. 전체 후속조치 중에 가장 큰 규모다.
후쿠시마 사고처럼 원자로의 핵연료가 녹아내리면 많은 양의 방사능 가스가 발생한다. 그러면 원자로가 들어있는 건물(격납건물)의 압력이 치솟고 결국에는 폭발할 수 있다. CFVS는 이때 방사능은 거르고 내부 공기를 밖으로 빼 내부 압력을 낮추는 역할을 하는 장치다. 압력밥솥의 증기 배출을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이 설비는 월성 1호기에만 설치됐다가 지금은 철거된 상태다. 월성1호기에 CFVS 설치하면서 땅속에 파일을 박았는데, 이 파일이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의 차수막을 뚫어버린 것이다. 차수막은 방사성물질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2차 방벽이다. 한수원은 이 사실을 파손 6년 만인 2018년에야 인지했다.
이후 한수원은 이 설비 대신에 이동형 펌프를 활용한 ‘대체살수’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CFVS를 설치해도 중대사고가 났을 때 방사능 피폭 기준 (20m㏜)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게 공식이유다. 하지만 이미 600억원 가까운 비용을 쓴 이후였다.
이상홍 사무국장은 “한수원은 월성1호기 차수막 파손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지만 시기적으로 의혹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월성 2~4호기에 똑같은 걸 설치하려고 하다가 1호기에 문제가 있다는 걸 확인한 이후에 나온 발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정윤 대표는 “가장 핵심적인 설비라고 홍보했는데, 그렇게 중요한 설비를 바꾼 것은 초기에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는 의미”라며 “규제기관인 원안위의 검증·심사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CFVS를 설치하다가 뚫려버린 월성 1호기의 차수막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한수원은 애초 지난해까지 보수공사를 완료하겠다고 했지만 보수공사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수원은 “파일 설치위치 설계가 잘못돼 발생한 일”이라며 “올해 6월까지 차수막 보수 및 차수벽 보강을 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다른 사업들도 따져봐야
사정이 이렇다보니 완료로 분류된 사업들에 대해서도 하나씩 따져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수원이 국회에 제출한 5개 대책의 ‘후쿠시마 과제별 종결보고서’를 보면 하나당 2~3페이지에 불과해 사실상 보고서 만으로는 대책의 실효성을 파악하기 어렵다.
지난해 10월 후쿠시마 후속대책 예산을 지적한 전혜숙 민주당 의원은 “후쿠시마 후속대책에 쓰겠다던 예산을 슬그머니 줄인 것도 문제인데, 그나마 집행했다는 것조차 사업이 공중분해되거나 논란이 남아 있다”며 “더욱 문제는 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곳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병석 원자력안전연구소 소장은 “한수원과 원안위를 믿고 94.6%가 완료됐다고 보면 안 된다”며 “후쿠시마 후속조치가 제대로 진행됐는지 전면 조사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정윤 대표는 “나아가 추후에 필요한 조치들에 대해서도 점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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