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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뒷수갑의 기억…여전히 '합법적 고문' 인정되는 한국 - 한겨레

[한겨레S] 기획 _ 외국인보호소의 가혹행위
전두환 시절 감옥서 ‘뒷수갑’ 기억,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참담한 고통
‘돼지묶음’ ‘새우꺾기’ 본질은 고문…외국인보호소 잔혹사 이젠 끝내야
외국인 ㄱ씨가 지난 6월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새우꺾기’ 자세로 묶인 채 독방에 격리됐다. 특별계호실 폐회로텔레비전 영상 갈무리·ㄱ씨 대리인단 제공
외국인 ㄱ씨가 지난 6월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새우꺾기’ 자세로 묶인 채 독방에 격리됐다. 특별계호실 폐회로텔레비전 영상 갈무리·ㄱ씨 대리인단 제공
한 장의 사진이 잊었던 옛 기억을 불러냈다. 매트리스 한 장 깔려 있는 좁은 독방에 뒤로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줄이 묶였고, 머리에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방성구가 씌워져 있었다. 나의 20대 때 감옥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옛날 자료사진이 아닐까 해서 기사를 다시 보니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30여년 전 내가 감옥에서 당한 그 모습 그대로의 고문이 지금도 버젓이 행해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게 첫번째 충격이었다. 나는 1986년 노동운동을 하다가 첫번째 감옥살이를 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벌어져 가석방이 될 때까지 13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여러 번 보안과에 끌려가고, 징벌을 받아서 독방에 여러 번 갇혔다. 1980년대와 무엇이 다른가? 1986년 12월, 유난히 추운 겨울의 어느 날로 기억된다. 그때는 감방 안의 물이 꽝꽝 얼었다. 난방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날에 교도소의 처우와 관련해서 항의 투쟁을 하다가 보안과로 끌려갔다. 보안과 직원들과 경비교도대원들이 들이닥쳐서 방 안에서 구호를 외치는 나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보안과로 끌고 갔다. 보안과 지하실에서도 흠씬 두들겨 맞고 독방에 묶여서 내동댕이쳐졌다. 나무 마루에 매트리스 한 장 깔린 독방에 뒤로 수갑이 채워지고, 팔목과 팔은 포승줄로 묶였고, 그 포승줄을 다시 발목으로 연결해서 당겨놓았으니 앉을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어서 배를 바닥에 대고 버둥거리는 돼지 신세가 되었다(돼지도 이런 고통을 가하는 식으로 묶어서는 안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팔과 발을 묶었던 포승줄, 손목의 수갑은 점점 더 조여와서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는데, 그런 일을 뒤늦게 알게 된 양심수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감방 문을 걷어차면서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외쳤다. 그러자 곧바로 보안과 직원과 경비교도대원들이 들이닥쳤고, 여느 때처럼 보안과 지하실에 ‘돼지묶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먹방’에 처넣어졌다. 먹방은 요즘 유튜브의 그런 먹방이 아니다. 검은 먹처럼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새까만 어둠만이 있는 방이다. 옆에 누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먹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팔과 다리를 조여오고, 피가 통하지 않고, 온몸에 가중되는 고통들보다 더 심각한 일은 배설을 어떻게 하느냐였다. 다음날 고문수사관들이 먹방이 있는 특별사동 옆으로 수감되면서 우리는 먹방에서 풀려났지만, 그 치욕스러운 기억은 두고두고 남았다. 1987년 5월에는 단식 끝에 다시 독방에 묶이는 신세가 됐다. 단식 끝이라서 힘이 없어서인지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더는 버티기 힘들어서 혀를 깨물었다. 혀를 물어서 피를 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바닥에 배를 대고 버둥거리면서 혀를 깨물고 마룻바닥에 턱을 내려쳤다. 그러자 혀 끝부분이 잘리고 피가 입에 흥건히 고였다. 그러자 교도관들은 방문을 따고 들어와 내 팔다리를 묶었던 포승줄을 더 조이고, 머리에는 방성구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나는 항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팔과 다리에 선명하게 남았던 포승줄의 자국은 희미해졌지만 그때의 고통을 당했던, 그때의 그 비참함은 두고두고 기억 속에 남았다.
법무부가 2004년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설치한 새 보호시설의 당시 내부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법무부가 2004년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설치한 새 보호시설의 당시 내부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그건 고문이었다. 그 명칭을 ‘돼지묶음’이라고 하든 ‘새우꺾기’라고 하든 본질이 고문이라는 데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 고문이 1980년대의 군사독재 정권 시절이 아닌 2021년에 행해졌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우리나라는 1995년에 유엔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했다. 유엔 고문방지협약에 의하면, “공무원이나 그 밖의 공무 수행자가 직접 또는 이러한 자의 교사·동의·묵인 아래, 어떤 개인이나 제3자로부터 정보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개인이나 제3자가 실행하였거나 실행한 혐의가 있는 행위에 대하여 처벌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인이나 제3자를 협박·강요할 목적으로, 또는 모든 종류의 차별에 기초한 이유로, 개인에게 고의로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통칭한다. 고문방지협약의 원제목은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이다. 잔혹하고 비인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도 모두 고문과 같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너무 당연한 얘기인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에서 교도소를 비롯한 수감시설에서 징벌을 이유로 한 고문이 사라지고, 먹방도 사라지게 된 것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고, 수감시설에서 일어나는 고문에 해당하는 가혹행위들이 계속되자 그에 대한 시정 권고를 하면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감시설에서는 과거의 가혹행위들이 등장한다. 더욱이 감시의 눈이 거의 미치지 않는 외국인보호소에서는 드물지 않게 지적되는 문제들이다. ‘고문’을 대하는 법무부의 태도 이 사건을 접하면서 두번째 충격을 받은 것은 법무부의 태도였다. “보호장비 사용은 보호외국인의 자해 방지와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제목의 해명서는 실망을 넘어 충격 그 자체였다. 해명서에는 해당 외국인이 외부에서 그리고 보호소 내에서 했던 통제되지 않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를 폐회로텔레비전(CCTV) 자료를 근거로 내놓았다. 보호소로서도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을 항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해명서를 해당 보호소가 아니라 법무부가 내놓았다는 점에 있다. 외국인보호소를 감독할 위치에 있는 법무부가 외국인보호소의 조처를 이해하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법무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새우꺾기가 규정에 없는 과도한 조치”임을 인정하고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답변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법무부는 ‘새우꺾기’와 고통스러운 계구 사용, 방성구 사용 등은 분명 고문행위임을 분명히 했어야 한다. 그런 명확한 입장 위에서 진상조사도 실시하고, 재발방지 대책도 세우겠다고 해야 한다. 일반적인 조처로는 그 괴물 같은 행동을 막을 수 없다고 항변하는 것은 고문에 대한 인식이 불철저했음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외국인이라고 해서 고문을 해도 되는 게 아니다. 고문은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자행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 금지의 영역이다. 변명과 해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분명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순서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인권단체들이 지난달 29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외국인보호소 내 인권유린 등을 규탄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인권단체들이 지난달 29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외국인보호소 내 인권유린 등을 규탄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더욱이 법무부 해명서는 일방적으로 보호소의 입장만 대변하고, 해당 외국인이 보호소에서 당했던 “불법적 도구인 박스테이프, 케이블타이 등으로” 수시로 결박당했던 점이나 치통 때문에 치과 진료를 요구했음에도 거부되었던 점 등은 삭제되어 있다. 사실 외국인보호소에서 비인도적이거나 굴욕적인 처우가 자행된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2019년에는 보호소에서 제대로 된 의료 조처를 받지 못해서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2007년 2월 여수외국인보호소에서 화재가 나서 보호소에 갇혀 있던 외국인 10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다치는 참사를 겪었다. 그때 철창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그런 참사가 일어났다. 해당 시설의 담당자는 철창문을 열어주지 않은 이유를 ‘도망갈까 봐’라고 했다.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진 것일까? 외국인들이 외국인보호소를 ‘관타나모 수용소’라고 부르는 이유를, 도리어 교도소가 더 낫다고 항변하는 이유를 법무부는 똑바로 보아야 한다. 잔혹한 처우, 굴욕적인 대우가 여전히 행해지고, 고문행위가 불가피한 조처로 용인되는 그런 수용소를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가. 고문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 트라우마는 평생을 간다.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들에게 가해졌던 부당한 처우와 대우, 그리고 외국인보호소의 잔혹사가 이번 기회에 끝날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법무부가 진상조사 단계에서부터 ‘고문’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을 세우기를 바란다. 우리가 당사국으로 가입한 고문방지협약부터 정독한 다음에 진상조사에 임하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고문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 절대금지 영역이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4·16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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