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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학살의 기억'…망언이 권력을 얻을 때 - 한겨레

[한겨레S] 이라영의 비평_망언 정치

윤석열의 실언, 실수인가 신념인가
전두환 옹호에 부마항쟁 논란까지
망언으로 지지자를 결속하는 정치
혐오배설자에게 윤리적 해방감 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가 지난 25일 오후 대전시 중구 대흥동 국민의힘 대전시당을 찾아 지지자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가 지난 25일 오후 대전시 중구 대흥동 국민의힘 대전시당을 찾아 지지자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침묵하는 다수’(the silent majority)라는 개념은 20세기 전까지는 대체로 망자를 뜻하던 말이었다. 로마 제국 네로 시대의 작가 페트로니우스의 표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다. 이 세계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의 수가 많기에 죽음을 ‘다수에게 돌아갔다’고 완곡하게 표현했다.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늘날 사용하는 ‘침묵하는 다수’의 개념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 내에서는 반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1969년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방송 연설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미국인 여러분”에게 호소했다.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더 빨리 끝내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종전을 빨리 끌어내기 위해 미국인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길 호소하며 반전을 외치는 사람들을 분란을 만드는 집단으로 왜곡했다. 그렇다면 이 ‘침묵하는 다수’의 실체는 있는가.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에 찬성하는 ‘침묵하는 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반전운동이 못마땅한 사람들에게 침묵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준다. 보수 정치인들은 ‘침묵하는 다수’라는 가상의 집단을 언급하길 좋아한다. 특정한 이념을 가진 극성스러운 소수가 선량한 다수를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도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무시당한다고 주장했다.
‘침묵하는 다수’는 진짜 존재하나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가 지난 19일 부산 해운대갑 당협 사무실을 방문해 당원들에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취지의 전두환 옹호 발언을 했다. 이어 “호남에도 이런 얘기 하는 분들이 꽤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차원을 넘어 호남에도 ‘꽤’ 있다는 언급을 통해 마치 호남에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왜곡시킨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증언하는 목소리, 전두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 여전히 이어지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눌려서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5·18기념재단 통계에 따르면 광주항쟁으로 사망한 사람만 260여명에 이른다. 아직도 ‘실종’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 생사 확인조차 되지 않은 이들이 많아 원통한 곡성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학살에 대한 증언을 침묵시키는 권력이 있었고, 학살의 당사자인 전두환은 41년이 지나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 후보는 사과를 요구하기는커녕 ‘그것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런 발언은 실수가 아니라 신념의 산물로 읽힌다. 발언 다음날 그는 페이스북에서 “어제 제가 하고자 했던 말씀은 대통령이 되면 각 분야 전문가 등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해 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썼다. 인재 기용의 모범 사례로 들 만한 인물이 그에게는 전두환이라는 것이다. 발언에 논란이 일어나면 윤 후보는 매번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었으며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억울해한다. 그의 사과는 “아무리 ‘아, 이건 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했더라도, 국민들께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시면 그 비판을 수용하는 게 맞다”였다. 풀어보자면, 나는 여전히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망언은 정치가 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증오
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받고 있어서 자신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다며 억울함을 표한다. 거침없이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발언을 쏟아내는 트럼프는 이들의 입에 자유를 준다. 망언을 통해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정치인이 정치적 힘을 가질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는다. 사람들이 자꾸만 망언을 듣다 보면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윤리적 감각이 흔들린다. 역사를 왜곡하고, ‘침묵하는 다수’라는 실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결국 혐오 감정을 배설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자의 망언은 윤리적 해방감을 준다. 윤 후보의 출마 선언에서 여러번 중요하게 언급되는 개념이 ‘자유’였다. 모순되게도 보수 정치는 ‘자유’를 좋아한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7월 노동자에게 일할 자유를 주기 위해 주 52시간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했다. 윤 후보는 가난한 사람도 부정식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윤 후보와 경쟁하는 홍준표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는 “부자에게 돈을 쓸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선택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노동 착취를 자유롭게 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빈곤층을 비하하고, 각종 막말을 하나의 의견처럼 둔갑시킨다. 반면 기득권을 핍박받는 피해자처럼 묘사한다. 현재 홍 후보와 윤 후보는 서로 ‘망언 리스트 25건’과 ‘막말 리스트 25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2017년 대선에서도 홍 후보의 말이 수시로 문제가 되어 당시 민주당 캠프에서 ‘홍준표 후보의 10대 막말’을 선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막말 정치인으로 꼽히던 홍 후보가 뱉은 수많은 발언이 잠시 가려질 정도로 윤 후보는 분야별로 부지런하게 망언의 기록을 쌓는 중이다. 그들이 경쟁적으로 주고받은 망언과 막말로 타격을 받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의 말 속에서 난타당하는 노동자, 여성, 호남 사람 등이다. 죽어서도 할 말이 많은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침묵당하는 다수가 아닌가.
이라영_ 예술사회학자.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2020) <타락한 저항>(2019) 등의 저자.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평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비평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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