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구한말 연해주로
아버지는 우즈베크에 강제이주
나는 ‘뿌리’ 찾아 한국으로 와 원고려인문화원의 차이고리(43) 원장은 연안 차씨로 우즈베키스탄 국적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에서 연해주로, 아버지는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주했다. 이주자의 삶을 산 덕분에 어려서부터 ‘뿌리’에 대한 생각이 깊었던 그는 뿌리가 있는 이곳에 둥지를 틀고자 한다. 그러나 조국의 문은 아득하기만 하다.
‘외국국적동포 국내거소신고증’이라는 것이 있어요. 한국 정부가 나 같은 외국국적 동포한테 주는 신분증입니다. 나는 최근 졸지에 거소신고증을 새로 만들어야 했어요. 작년 말에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신분증 제도를 바꾸면서 새 여권을 발급했거든요. 여권이 바뀐 외국인은 한국 출입국·외국인청에 여권정보 변경신고를 해야 합니다. 온 가족이 손잡고 신고하러 갔더니 대뜸 거소신고증을 다시 만들어야 한대요. 재발급 비용이 하나당 3만원인데, 우리 네 식구 것을 합하면 그 돈은 또 얼마겠어요. 재발급 안 한다고 하니, 그러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겁을 주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새로 받았어요. 그런데 아뿔싸, 새 거소신고증에 내 이름 뒤에 아버지 이름이 잇따라 쓰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마치 내 이름이 두 배로 길어진 것처럼 말이죠. 새로 받은 여권에 전에 없던 아버지 성명 기재란이 생겨서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거소신고증에는 아버지 이름이 마치 내 이름처럼 적혀 있는 겁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니 이름자라도 자주 뵙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황당한 이유로 내 이름이 달라진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출입국·외국인청에 문의했더니, 여권 앞장에 본인 이름만 기재하기로 국제적으로 약속했고, 그것을 컴퓨터로 읽어 그대로 거소신고증에 기록한 것이므로 수정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컴퓨터가 어찌 작동되는 것인지 잘 모르니 더 따지기 힘들었는데, 암튼 무척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졸지에 이름이 바뀐 나는 운전면허증을 바꿔야 하고 은행계좌와 카드 명의도 다 바꿔야 합니다. 자격증, 계약서 같은 서류도 내 것임을 증명하려면 싹 다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비상식적인 일을 말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고요? 우리는 외국인이니까요! 나는 우즈베키스탄공화국 타슈켄트에서 왔습니다. 아버지는 8살이던 1937년에 조부모님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해서 코칸트 지역에 정착했어요. 함경도 출신인 할아버지는 구한말 고향을 떠나 연해주로 이주하셨고요, 아버지는 후에 타슈켄트로 옮겨 가 나를 낳으셨어요. 친척들이 하는 “아즈바이”(작은아버지), “맏아바이”(큰아버지) 같은 함경도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내 모어는 러시아어입니다. 우즈베키스탄 독립 후 민족어 학습이 허용되어 학교 동아리에서 고려인 할머니한테 조선어를 배울 수 있었어요. 그때가 88올림픽이 열린 바로 뒤라 우리 조국이 대단하다는 자부심이 높아질 때였지요. 고등학생 때 집 근처에 생긴 한국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사범대 다닐 때는 동포 초청 연수 프로그램에 참석하느라 처음 한국을 방문했지요. 학교 졸업하고 타슈켄트에 있는 한국어학원에서 고려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어요. 그 뒤로 두번 한국에 와서 이런저런 일을 했고, 4년 전 동포비자를 받아서 가족과 함께 왔어요.
어디도 오라는 이 없는 이방인
고려인마을까지 형성되었는데도
‘너 외국인이잖아’ 여전한 외면
고려인이라는 명칭은 한국 사람들한테 처음 들었어요. 우리는 스스로를 거례사래미(고려사람)나 저센사래미(조선사람)라고 칭했고, 러시아 사람들은 우리를 ‘까레이쯔’라고 불렀는데, 한국에 오니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카레이스키’라 부르기도 하던데, 뭐 다 자기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지요.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지만, 꼭 말하고 싶은 한 가지는 고려인은 ‘한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도움을 요청하면 어떤 한국인은 “너 외국인이잖아!” 합니다.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이렇게 갈라내면 마음 아픕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숱하게 따돌림당했는데 말입니다. 소련이 망가지고 15개 독립국가가 생겼는데, 나라마다 자민족중심주의가 무척 강해졌어요. 우즈베키스탄공화국도 우즈베크족을 중심으로 재편됐습니다. 공용어를 러시아어에서 우즈베크어로 바꾸고 모든 공식 문서를 우즈베크어로 바꿨어요. 우리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었어요. 먹고살기 힘들어지고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어 불안해졌습니다. 궁리 끝에 연해주로 되돌아간 사람도 있고, 거기서도 받아주지 않아 발을 동동거리는 사람도 있어요. 고려인은 어디론가 또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오라고 손짓하는 곳은 없습니다. 나는 어릴 때 우즈베크 아이들에게 ‘냄새나는 김치 먹는 놈’ ‘된장 처먹는 놈’이라고 놀림받았어요. 어른들께는 역사 잊어버리면 너는 거례사래미도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사범대에서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전공했어요. 고려인문화협회 소속 청년회 ‘화랑’의 부회장으로 일했고, 탈춤을 배워 명절이나 행사 때마다 공연했어요. 그러면서 마음속 민족 개념이 점점 깊어졌어요. 가족과 함께 와서 자리 잡은 곳이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입니다. 이 지역 집세가 좀 싸거든요. 내가 오기 전에도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뒤로 꽤 늘어서 지금은 4000명 정도 되나 봅니다. 사람이 많아지니 지역에 러시아 음식점, 고려인 상점, 고려인 문화원이 여럿 생겼어요. 내가 일하는 원고려인문화원은 6월이면 1주년을 맞게 됩니다. 고려인에게 한국어, 한국 문화와 역사를 가르쳐요. 부모 따라온 고려인 아이들이 무척 많아요. 대부분 한국 공립학교에 다니는데, 한국말을 못해서 공부를 잘 못 따라갑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원에서 방과 후 학습보조를 해줍니다. 고려인 교사들이 러시아어로 한국어, 영어, 수학, 사회를 가르치고 심리상담을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말을 몰라 이해하지 못한 것을 여기 와서 물어봐요. 여기서는 말이 통하니까 아이들이 의지하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우리가 능력이 좋아 무료로 운영하면 좋은데, 그게 안 되니 부모들한테 돈을 좀 받고 있어요. 정말 미안하죠. 너무 빠듯해서 아이들한테 밥도 간식도 못 먹여요. 거의 매일 와서 고생하는 교사들에게 교통비밖에 못 줍니다. 교사 중에는 공장에서 일 마치고 가르치러 오는 이도 있어요. 대부분은 서너 군데서 일해 번 자투리 돈을 모아 월세 내고 입에 풀칠하며 삽니다. 나도 여기서 가르치고 안산 두 군데서 한국어를 가르쳐 간신히 버팁니다. 우선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 잘 가르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고생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더 이상 떠돌지 말고 여기서 잘 정착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충을 이야기하니 누군가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해보라고 알려줍니다. 알아보니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야 지역아동센터 교사가 될 수 있다고 해요. 우리 교사들은 다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한국 사회복지사 자격증 같은 것은 없어요. 그렇다고 한국 사회복지사들이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서 우리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참 난감합니다. 아이들이 공립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집중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대안학교를 운영하면 어떨까 싶은데, 그 또한 막대하게 들어갈 예산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서 생각만 하다 말았어요. 우리 교사들 전문성을 인정해주고 대안학교나 방과 후 학교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좋겠어요. 어른들도 한국어 배우는 것이 큰 문제예요. 한국어 모르면 일하다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무조건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강요하면 그것도 곤란해요. 먹고사느라 시간 맞추기 어렵거든요. 내가 안산에서 가르치는 성인반은 밤 9시에 시작해요. 낮에 시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겁니다. 이렇게 우리 형편에 맞게 프로그램을 준비해주면 좋겠어요.
거례사래미·까레이쯔·고려인 등
다르게 불려도 다르지 않은 사람
좋은 시민 되려 준비한답니다
우리가 생일잔치, 환갑잔치 하는 것을 보고 한국인들이 놀라요. 뭐 그리 거창하냐고 웃습니다. 또 한식과 단오, 추석 제사가 왜 그리 중요하냐고 물어요. 조선 문화를 잘 계승해왔다고 자부하던 우리들 문화가, 본토인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보이나 봅니다. 왜 중요한가 생각해봤어요. 그것은 아마 강제로 흩뿌려진 채 고난을 헤치며 생명을 지켜온 우리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살아남아 첫돌과 환갑을 맞은 것이 더없이 기쁘고, 명절이 소중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가족과 친척이 모일 기회가 있으면 풍족하게 나누려 애쓰는 것입니다. 이런 모임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회이기도 해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말입니다. 어른들은 콜호스(집단농장)에 모여 살았던 덕분에 민족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도시로 옮겨 간 이들도 많고, 또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그간 지켜온 문화를 다 잊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하나라도 더 전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우리 민족끼리 서로 믿고 도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고려인 자랑도 좀 하겠습니다. 강제이주 때 스탈린은 고려인을 기차에 태우고 40일을 달려서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려놨어요. 기차에 탔던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죽었을 만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이동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버려졌어도 살아남은 것이 우리 민족입니다. 어른들은 허허벌판에 땅굴을 파고 살며 콜호스를 일궜어요. 얼마나 열성을 바쳤는지 ‘고려인은 농사의 귀재’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콜호스는 생산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교육과 문화 활동을 같이 했던 단위예요. 결속과 책임이 강한 집단이지요. ‘사회주의 노동영웅’도 여럿 나왔는데, 김병화 선생님은 두번이나 노동영웅이 됐어요. 김병화콜호스는 소련 최고 모범 농장으로 각지에서 다 견학 올 만큼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또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홍범도 장군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지요. 장군님처럼 대한민국이 서기까지 목숨 바쳐 기여한 고려인도 많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고려인은 이런 자긍심을 지키고자 합니다. 원불교가 운영하는 우리 문화원은 고려인을 존중하며 활동 방식을 정합니다. 한식날 제사 지낸 이야기 들어보시겠어요? 원불교는 원래 제상에 음식이 아니라 꽃만 올린답니다. 고려인 눈에는 아주 이상해 보이죠. 그래서 제사상을 두 가지로 차렸어요. 하나는 꽃을 올린 원불교식 제사상, 하나는 음식을 올린 고려인식 제사상입니다. 고려인도 술을 허용하지 않는 원불교 문화를 존중해서 술이 아니라 차로 제사 지냈어요. 서로 종교를 권유하는 일도 일절 없어요.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한국에 와서도 특이한 소수자 그룹이 된 우리 입장을 이해하고, 3대를 거치며 형성된 정체성과 문화를 소중하게 대해주니 아주 고마운 일입니다. 이제 콜호스 시대는 갔습니다. 우리는 또 어딘가에 자리 잡고 살아내야 해요. 한국도 우리 노동력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우리가 좋은 시민이 되고자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다. 떠나온 사회와 살아내야 할 사회에 하고픈 말이 많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못한 채 눈동자에 잠기곤 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한다.
0 Response to "내 이름은 거례사래미, 저센사래미, 뿌리 찾는 '고려인' - 한겨레"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