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좋은 노조가 좋은 나라를 만든다
건보공단 상담사 직접고용 요구
사측은 노조 반대 이유로 미뤄
정규직들, 임금·복지 손해 우려
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은 외면
“국민건강보험공단도 예전에는 임금이나 노동조건이 민간 대기업은 물론 다른 공공기관에 비해서도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때 생긴 노동조합이 이제 30년이 넘었다. 당시 우리와 처우가 비슷했던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 상황이 상대적으로 나빠지면서 지금은 우리가 기득권이 됐다. 연대하기보다 가진 것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건강보험공단 50대 정규직 A씨는 31일 공단 정규직 노동자들이 고객센터 상담사들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11개 민간위탁업체 소속인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에 따른 직접고용을 요구한다. 하지만 공단은 최근까지도 결정을 미뤄왔다.
공단이 내세운 가장 큰 명분은 정규직 노조의 반발이다. 공단이 미적대는 사이 정규직의 반대 목소리는 더 커졌다. 지난해 5월 정규직 노조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고객센터 노동자 직접고용에 반대한다는 답변이 75%가 넘었다. 이후 노조는 직접고용 사업 추진을 사실상 접었다. 지난해 말 치러진 정규직 노조위원장 선거에선 ‘조합원 동의 없는 고객센터 직접고용 반대’를 내건 현 집행부가 다른 두 후보를 제치고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로 당선됐다. 역시 50대인 정규직 B씨는 “상담사들이 직접고용돼도 일반직이 아닌 업무지원직이라 우리가 손해볼 일은 없을 거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며 “당장은 아니더라도 향후 우리 몫이 줄어들 거라는 논리였다”고 말했다.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사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쪼개진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적나라한 단면을 보여준다. 노동운동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인 연대는 정규직의 압도적 현실 논리 앞에 맥을 못 춘다. “조합원 이해만 대변하는 노조는 하나의 이익단체에 불과하다. 민주노조가 존립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B씨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게 현실이다.
원래 공단 정규직이 담당했던 상담 업무는 2006년 외주화됐다. 정규직이 높은 수준의 임금과 사내 복지 혜택을 누릴 때 비정규직 상담사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았다. 경력이 쌓여도 임금은 오르지 않았고, 2년 단위인 공단과 위탁업체의 계약 갱신 때문에 실적 압박에 시달렸다. 정규직과 마찬가지로 고용 안정과 연공급을 적용받는 게 상담사들의 꿈이다. 하지만 정규직은 여기에 냉담하다 못해 대놓고 반대한다. 자신의 ‘파이’(기득권)를 뺏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본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도
노동, ‘대화의 장’에서 싸워야
■ 연공급과 노동시장 이중구조
노동시장의 대기업·중소기업 격차
호봉제 등 연공급 독점이 주원인
고용 확대·임금 조정 교환 제안은
노동계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난제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간 격차가 복합돼 나타난다. 정규직·비정규직 격차가 세계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라면 기업 규모에 따른 격차는 한국적 특수성에 가깝다는 것이 이 문제를 연구해온 정승국 중앙승가대 교수의 설명이다.
정 교수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현격한 격차의 주된 원인은 호봉제로 대표되는 연공급이라고 짚는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이 높은 임금과 기업 복지, 연공급을 독점적으로 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다른 나라가 갖고 있지 않은 연공급은 (지금과 같은 저성장기에)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연공급을 당장 폐지하지 않더라도 연공성을 줄여 나가는 방향이 맞다”고 말했다.
이런 판단은 고용 확대와 임금 조정을 맞바꾸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지급 여력이 있는 대기업과 공공부문이 고용을 늘리는 대신 임금은 평균에 수렴하도록 조정해 청년들에게 돌아갈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노조가 지금처럼 사업장 내 임금 극대화를 최우선 목표로 추구하면 총고용 확대는 불가능하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은 “공공부문에서 고용 극대화를 하려면 임금체계를 바꿔야 한다. (같은 직무를 하는데도 소속 기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연봉이 수천만원씩 차이 나는 상황에서) 기관별 직무·직능급 도입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사회 전체에 통용될 수 있는 임금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규직화 대상인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차별 없는 임금체계 적용을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공공부문 정규직이 적용받는 호봉제는 평생 안정적인 임금 상승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연공급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공부문 내부의 격차는 줄일 수 있지만 민간을 포함한 노동시장 전체로 보면 격차를 더 벌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 정년 연장과 임금체계 개편
전문가들은 “노동운동 대의가 전체 노동자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연공성을 낮추는 방향이)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하는 게 필요하다”(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고 말한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임금체계 개편은 매우 예민한 주제이다. 박근혜 정부 때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려다 노동계의 반발로 무산된 전례가 있다. 정혜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은 “(정규직 노동자) 누가 직무급이 나쁘다고 하겠느냐”면서도 “어떤 직무에 얼마의 임금을 줄지, 성과는 어떻게 측정할지 등을 고려하지 않고 노조가 이기적이라고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이해관계를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조정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학자들은 고령화 시대를 맞아 정년 연장과 직무급제 도입을 교환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정년(만 60세)과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2033년까지 만 65세로 연장) 간 소득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도 정년 연장은 오래 미룰 수 없는 논의 과제다. 노조 내부에서 입장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노조 내 청년 조합원들을 만나보니 직무급에 대한 관심이나 호응이 적지 않다. 앞으로 노조 내부적 추동 조건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공공기관위원회 1기 위원장을 지내며 직무급제 도입을 논의했다.
전문가들은 임금체계 개편이 전체 노동시장의 ‘하향 평준화’로 귀착될 가능성을 경계한다. 저임금 노동자를 위한 최저임금 인상, 고용안전망 확충 등과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노동시장 이중구조 극복’이라는 취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재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자 양보론’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일하는 사람들 내에서 내부자와 외부자 간 격차와 분절이 중요한 문제인 건 맞다”면서도 “노동자 내부 파이를 나누는 것만 봐서는 안 되고 노사관계라는 더 큰 틀에서 사측이 해야 할 일을 같이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 좌절된 산별노조운동
산업 내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법
산별노조 운동도 현실적인 한계
사회적 대화는 국가 민주화 장치
개별노조들 포괄하는 정책도 가능
기업들은 1987년 6월항쟁과,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으로 급성장한 노조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주화 전략을 택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이 확산하자 노동운동은 노동 내 격차를 줄이기 위한 산별노조 건설을 핵심 과제로 내걸었다. 독일·프랑스처럼 산별노조를 만들어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모두에게 혜택이 가도록 산업을 대표하는 사용자단체와 산별교섭을 벌인다는 취지였다. 산업 내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방안으로 노동계가 한동안 천착한 대안이었다.
하지만 산별노조운동은 대기업 중심인 기업별 노조 체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늬만 산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산별노조에 대한 지향은 있었지만 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구현할지, 어떤 내용으로 협약을 체결할지 등에 대한 고민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산별노조운동은 여전히 의미있는 방향이다. 다만 어떻게 구호에 그치지 않고 현실화할지가 관건이다. 기업별 노사관계를 전제로 노조가 조합원만을 대표하게 돼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부터 발목을 잡는다.
사용자단체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도 있다. 여러 정부 위원회에 참여해 산업·업종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들이 단체협상에서 노조의 카운터파트 역할은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작은 병·의원 간호조무사들이 개별 사업장을 뛰어넘은 업종 노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교섭에 응할 의무가 있는 사용자단체가 없다. 이정희 본부장은 “단체협약이 확장성을 가지게 되면 노조가 교섭 과정에서 자신이 대표하려는 노동자들의 직종, 직군, 성별, 학력, 고용형태 등 차이를 고려해 공통된 이해를 관철하려 애쓸 것”이라며 “사용자 또한 마찬가지”라고 했다.
프랑스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프랑스는 업종별 단체교섭위원회에서 업종 대표 노조와 사용자단체가 만든 합의안의 효력을 정부가 행정명령을 통해 업종 내 모든 사용자·노동자에게 확장할 수 있게 돼 있다. 단체협약이 업종 내 공적 규범이 되는 셈이다. 2019년 총선 때 영국 노동당도 이와 유사한 업종별 노사공동위원회 설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 이후 단체협약 적용률이 감소한 결과 노동시장 내 불평등이 확산했다는 문제의식을 깔고 있다.
■ ‘파업이냐, 대화냐’는 이분법
삭발, 삼보일배, 고공농성, 단식…. 열약한 처지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오늘도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이 모습만 보면 1980년대의 풍경과 구분하기 어렵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노동자들의 극한 투쟁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 과연 저렇게 해서 풀 수 있는 사안일까 의문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기후위기, 유통혁명에 따른 산업 전환 문제는 개별 사업장이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대형마트의 경우 오프라인 매출이 줄어 매장이 문을 닫을 때 폐점을 반대하는 운동이 합리적인지, 사회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지, 지속 가능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급성장하는 온라인 마트 분야 일자리를 늘리고 재교육을 지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점일 수 있다는 얘기다. 박정환 전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책국장은 “한국 노동운동이 조합원 고용 안정은 많이 요구했지만 전체 고용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도 산업·업종 차원의 규범 형성은 중요한 과제다.
노동계, 특히 민주노총은 노사정 대화를 노조에 양보를 강요하고 들러리 세우려는 자본과 정부의 술수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23년 전 경험이 미친 영향이 크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월15일 설립한 1기 노사정위원회는 그해 2월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는 파견법 제정과 정리해고 법제화 조항이 포함됐다. 그 후폭풍으로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가 총사퇴하고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했다. 이후 20년 넘게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시도는 내부 분란 속에 번번이 좌절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참여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원포인트 합의가 불발됐다.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 컨설턴트는 사회적 대화를 정보·협의·교섭(합의)의 삼각형으로 설명한다.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가 실패하는 이유는 정보 공유 과정, 의견을 나누는 협의 과정 없이 곧장 ‘대타협’을 시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총연맹, 국가 정책 형성 적극 개입해야
전체 고용 늘리는 문제 접근하려면
산업·업종 차원의 규범 형성 중요
총연맹은 ‘투쟁 고수’ 태도 벗어나
노동계의 ‘내셔널 센터’ 역할 해야
노동계도 사회적 대화에 대한 관성적 태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설사 사회적 대화가 ‘자본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하더라도 총연맹은 국가 단위의 정책 형성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효원 컨설턴트는 “사회적 대화는 국가를 민주화하고 자본으로부터 중립화해 노동문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장”이라며 “노동운동이 대화에 참여할 때 조직도 커지고 정책능력도 강화되는 등 발전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경사노위에서 합의한 안건 중 다수는 사회안전망 강화, 산업안전같이 노동계 입장에서 득이 되는 내용이었다”며 “개별 노조 차원에서 포괄하지 못하는 사안은 사회적 협약을 통해 포괄해야 조직되지 않은 취약 노동자를 위한 정책 시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총연맹의 역할은 개별 사업장의 현안에 집중하는 단위노조의 그것과 뒤섞여 있다. ‘내셔널 센터’가 그에 값하는 역할을 못하는 셈이다.
민주노총은 오는 11월 110만 조합원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벌인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정말로 총파업이 가능할 거라고 믿는 조합원은 없다. 이병훈 교수는 “노조가 투쟁을 통해 모든 걸 관철시킬 능력이나 조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투쟁을 고수하는 것은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라며 “발목이 잡힐 수 있다는 우려로 아예 협상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노동운동의 전략 부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총연맹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왜소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집중적 사회적 대화가 어렵다면 의제나 업종, 지역별 원포인트 대화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업종별 대화는 문재인 정부 들어 본격화했다. 경사노위 14개 주요 합의 중 8개가 코로나19 공공의료 확대, 정보기술(IT) 프리랜서 보호, 배달노동자 산재보험 확대,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 등 업종 관련이었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최근 한국노총이 주최한 사회적 대화 포럼에서 “경사노위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면 이해관계자 간 쟁점과 이견이 큰 사안보다는 특정 당사자가 조금씩 양보를 통해 파이를 키우는 통합적 사회적 대화에 주력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업종별 위원회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교수는 “업종별 위원회는 전체 산업 수준의 노동 현안 또는 제도 개선 관련 사항을 다뤄야 한다”면서 “민주노총 불참 등 노사정 신뢰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업종별 위원회를 통해 사회적 대화 성과를 지속적으로 축적해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조 조직률이 높고 중앙집중적 단체협약을 통해 표준 노동조건과 규범을 만들어내는 국가일수록 사회보장, 주거비, 등록금, 대중교통비 등이 노동자에게 유리하고, 사회의 양극화도 덜하다. 한국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조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정희 본부장은 “결국 노조가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와 관련된 문제”라며 “좋은 노조가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했다.
<시리즈 끝>
https://ift.tt/2RcOkia
대한민국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전환기의 노동, 길을 묻다](하)“연대보다 내 것 먼저” 현실에 무릎 꿇은 정규직 - 경향신문"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