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출마 공식화한 이광재 민주당 의원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56)은 매일 오전 4시30분에 깨어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5시에 서울 종로구 부암동 자택을 나와 걸어서 북악스카이웨이를 넘는다.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자동차를 타는 것은 사직공원에 다다라서인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는 오전 6시20분에 어김없이 도착한다. 직원들이 출근할 때까지 주로 책을 읽는다.
그는 2011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강원도지사직을 7개월 만에 상실하고 10년간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2019년 12월 특별사면됐고, 지난해 총선(강원 원주갑)에서 당선돼 10년 만에 정치권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12주기(5월23일)를 앞두고 지난 12일과 14일 양일간 이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과 여의도 카페에서 인터뷰했다. 내년 대선 출마를 사실상 공식화한 그는 정치적 공백기와 대권 도전 계획,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 삼성과 얽힌 루머 등에 대해 4시간여 동안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 10년 만에 정치에 복귀해보니 어떻던가요.
“디지털 세상, 그린뉴딜, 새로운 자본주의와 새로운 민주주의 등 바깥의 시계는 굉장히 미래지향적인 데 반해 정치권의 담론은 발달돼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정치를 떠나 있는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2011년부터 중국 칭화대에 2년간 유학한 후 여시재(국가 미래전략을 마련하기 위한 민간 싱크탱크·그는 부원장을 거쳐 원장을 맡았었다) 활동을 했어요. 중국·일본·러시아를 방문하고 책도 쓰면서 국가전략과 정책을 공부한 값진 시간이었죠. 자연의 치유력을 느끼며 인생공부도 많이 했어요(웃음). 산에 자주 다녔는데,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다르더라고요. 늘 걷던 북한산 길인데 어느 날엔 거미줄 한두 개가 얼굴에 걸려요. 열심히 안 살면 금방 녹슬겠구나 생각했어요.”
- 생계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나중에 문제가 좀 됐지만 도지사직을 그만두고 당시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소유의 골프장에서 고문 역으로 1년 정도 있으면서 급여를 받았고 여시재에서 준비 기간까지 합해 5~6년간 활동했으니까요. 또 중앙선데이에 10개월간 원로 인터뷰 연재를 하고 강연도 1년에 20~30건씩 있었어요.”
- 여시재를 기득권을 대변하는 연구단체로 보는 시선도 있어요. 특히 이사 중 한 명인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은 언론권력과 재벌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이어서 더 그런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여시재는 진보·보수 인사들이 함께하는 초당적 싱크탱크예요. 싱크탱크는 각계의 생각을 융합해 지혜로 전환시키는 게 중요하죠. 홍 회장을 이사로 추천한 분은 이헌재 여시재 이사장(전 경제부총리)과 이사진이었어요.”
- 참여정부 시절 홍석현 회장을 주미대사로 추천한 사람은 이 의원이 맞나요.
“아니에요. 홍 회장을 주미대사로 추천한 분은 정동영 장관이에요.”
- 어렵게 쌓아온 것들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경험을 했어요. 깨달음을 얻은 게 있습니까.
“청와대에서 재직하던 30대에 제 역량보다 너무 큰 권력을 가졌는데 세상을 이해하는 게 부족했어요. 처음엔 대단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백지장 하나도 뚫지 못하는 게 권력이에요. 그러니 권력은 언제든 사라지는 거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함을 배웠어요. 또 정치권엔 숱한 유혹이 있어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고 성장하는 게 쉽지 않은데, 힘든 시간이 많으면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가요(웃음). 그래서 결국 혼자 남죠. 그 시간을 잘 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대한민국 미래 준비가 시대정신
정치변동·경제변동 함께 와
국민 생각 반영 시스템 구축할 것
화제를 그의 대선 출마로 돌렸다. 선언만 5월 말·6월 초로 미뤄놨을 뿐 그의 출마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대선 출마는 확실한 것 아닌가요.
“(끄덕끄덕)”
- 왜 대통령이 되고자 하나요.
“저는 한국판 일론 머스크(테슬라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가 되고 싶어요. 머스크가 자동차산업의 기술혁명을 이끌고 우주에 도전했듯 세계에서 미래를 가장 먼저 만나는 나라,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지금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정치변동과 경제변동은 같이 와요. 양쪽에서 신주류가 탄생해야 하죠. 정치와 정부를 개혁하고 기술혁명과 분배혁명을 이루고 국민의 생각이 정치에 더 적극 반영되는 시스템을 구축할 거예요. 다양한 구상이 있어요.”
그는 구체적 아이디어들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 자신을 친문(재인)이라고 생각합니까(이 의원은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 캠프에서 활약했다).
“저는 친노(무현)죠.”
- 민주당 경선을 통과하려면 친문 당원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텐데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했던 분들이 저를 사랑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현재 민주당에서 한국 정치의 어젠다나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는 후보가 있나요? 없잖아요. 제가 그걸 말할 거예요.”
- 대중적 인지도와 지지율(1.3%·5월3일 리얼미터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여론조사)도 낮아요. 극복 방안이 있나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할까가 아니라 무엇이 필요할까를 고민해 제 목소리를 세상에 발신해보는 거죠. 저는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실험, 정치벤처를 20년 만에 재개해 볼 생각이에요. 사조직 캠프를 최소화하고 디지털 캠프를 꾸릴 겁니다. 온라인으로 회의하고 활동하면서 정책과 신념을 알리는 데 주력할 거예요.”
- 사조직 캠프를 최소화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조직이 집권하는 게 아니라 당이 집권과 국정운영을 하는 게 옳으니까요. 지금은 인재의 절반도 못 쓰고 있어요. 진보 측 다른 당은 물론이고 같은 당에서도 제한된 인재만 쓰고 있죠. 대한민국 인재 전부를 써야 유능한 정부가 탄생해요. 오프라인 사무실은 당에서 후보들에게 마련해주면 좋겠어요.”
- 이 의원의 대선 가도에 가장 큰 걸림돌은 박연차 게이트 등에 연루돼 유죄를 받은 일 아닐까요.
“제게는 형벌같은 거죠. 박연차 사건은 억울하지만 다른 건(2010년 유동천 제일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1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박연차 사건 연루 억울, 형벌 같아
‘유동천 불법자금’은 할 말 없어
그에게는 ‘친삼성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보이던 시절부터 이 의원이 삼성과 다리를 놓았고, 그 결과 참여정부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삼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를 두고 ‘삼성 장학생’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잖다.
- 이 의원이 참여정부 시절부터 삼성으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았다는 설이 있어요.
“네버(never·전혀). 그랬다면 검찰이 저를 탈탈 털었는데 안 나왔겠어요?”
- 지난해 5월 말 기준 공직자 재산신고를 보면 재산이 약 22억6000만원이더군요. 부인 명의로 된 건물 두 채도 있던데, 부암동 자택 가격은 공시지가 기준일 테고, 재산이 많네요.
“부모님 재산 9억원을 더한 거예요. 부암동 집 건축비는 이 집의 두 개 층 전세비로 충당했고 아내 명의로 된 건물 두 채는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 받은 유산으로 아내 형제들이 공동 구매한 거예요.”
- ‘친삼성’ 이미지는 어쩌다 생긴 건가요.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제가 삼성경제연구소에 재계 입장에서 대한민국에 필요한 과제가 뭔지를 보고서로 작성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완성된 보고서를 인수위원들에게 참고하라고 나눠준 일 때문이에요. 외환위기 직후였고 경제계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했거든요. 당시 국내 경제연구소 중 삼성경제연구소가 가장 규모가 컸어요. 또 마침 이건희 회장도 수년 전부터 정부 혁신을 이야기했고요.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를 받은 것은 그때 딱 한 번뿐이었어요.”
- 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이 의원이 삼성과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던데.
“노무현 대통령에게 반해 제가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이었어요. 여기에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여럿이 강사로 초빙됐죠. 이유는 당시 삼성경제연구소가 <정부 혁신의 길> 등 국가전략 서적과 보고서들을 많이 냈기 때문이에요.”
내가 삼성에서 지원받았다고?
그럼 검찰이 털 때 왜 안 나왔나
- 이건희 회장이 작고하고 한 달 후인 작년 11월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신 낼 수 있도록 하는 가칭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을 대표 발의했어요. 오해 살 일 아닌가요.
“2006년 10월에도 ‘미술품을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기부하면 법정 기부금으로 처리하자’는 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어요. 박물관과 미술관은 최고의 학교라는 게 제 오랜 지론인데, 좋은 작품은 고가여서 세금으로 구매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2006년, 2020년 발의한 법안 모두 미술품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한 거예요. 미술품 조세 물납 허용은 예술계의 오랜 숙원이고요.”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에 대해선 어떤 입장인가요.
“사면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전 세계 반도체 공급 부족 문제가 심각하고 오는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주요 의제가 될 전망이잖아요. 한국이 반도체 부문에서 확실한 지위를 갖는 게 유리한데, 이 부회장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해주는 게 맞죠.”
-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다고요.
“중2때 평창에서 당시 재야의 메카였던 원주로 전학간 후 사회운동가이자 생명사상의 원조격인 장일순 선생을 만났고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장 선생의 동생인 장화순 선생의 아들과 친구였거든요. 두 집에는 엄청난 양의 책이 있어 저도 독서삼매경에 빠졌어요. 그 영향으로 저는 진보의 가치를 뼛속 깊이 갖고 있죠. 하지만 어느 편에 고인 물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최적의 솔루션이 무엇인가를 늘 판단의 중심에 두죠.”
진보 가치 뼛속 깊이 갖고 있지만
어느 편에 고인 물 되고 싶진 않아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통했다. 1988년 5월 만 42세의 초선 의원과 23세의 보좌관으로 첫 인연을 맺은 후 21년간 함께했다. 마침내 대권까지 거머쥐었지만 노 전 대통령은 퇴임 1년3개월 만인 2009년 5월23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당시 이 의원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비보를 들었다.
- 이번 주 일요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2주기예요. 심경이 어떤가요.
“노 대통령을 생각하면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죠.”
- 돌아가시던 날 새벽녘에 노 전 대통령이 꿈에 나타났다고요.
“(한동안 허공을 보더니) 당시 뉴스는 온통 노 대통령 이야기여서 매일 밤 악몽을 꿨는데, 그날 밤에는 노 대통령이 나타나 하염없이 울다 사라지셨어요. 깜짝 놀라 깼고 불안한 마음에 자다깨다를 반복했죠. 새벽 3시쯤이었어요. 그러곤 몇 시간 후 비보를 전해들었죠. 성격이 분명한 분이시라 노심초사했는데 가장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된 거예요. 당시 검찰 수사는 진실을 밝히려는 게 아니라 노 대통령을 어떻게든 집어넣으려고 한 수사였어요. 너무 궁지로 몰았어요.”
- 언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예견했나요.
“노 대통령이 퇴임하시고 2008년 여름휴가를 강원도에서 저와 보내고 계실 때 정상문 비서관(참여정부 대통령 비서실 총무비서관)이 찾아와 이명박 정부가 가만히 안 있으려는 것 같다, 뭔가 일을 만들려는 것 같다고 전했어요. 실제로 저만 해도 정권이 바뀌자마자 강원랜드 수사를 시작으로 강원도 출신의 정부 산하 기관장들에 대한 대대적 수사를 해 압박감을 느끼던 때였어요. 그러다 점점 타깃이 노 대통령을 향해 간 거예요.”
- 노 전 대통령은 3번의 잇따른 낙선(1992년 부산 총선·95년 부산시장 선거·96년 종로 총선) 후 정치를 그만두겠다며 1996년 경기도 안산에 내려가 변호사 사무실까지 차렸어요. 그런 그를 참모들이 설득해 결국 대통령이 되게 했죠. 노 전 대통령 말년의 비운을 생각하면 후회하지 않습니까.
“정부를 이끌 유능한 사람들이 덜 준비된 상태에서 참여정부가 출발한 점은 아쉽게 생각하지만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노력한 일은 후회하지 않아요. 위대한 인물은 죽지 않고 말씀과 업적으로 남는 거니까요. 노 대통령과 함께 했던 분들이 현재 한국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동북아균형자론·디지털경제·세종시를 필두로 한 국토균형발전 등 그분이 제시한 시대적 과제는 현재의 과제로 남아있어요.”
난 ‘스승 노무현’ 사랑한 친노
그는 손해 무릅쓰는 지도자였다
- 노 전 대통령은 이 의원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뜸을 들이다 활짝 웃으며) 제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 중의 남자 그리고 스승이시죠. 낙선할 줄 알면서도 계속 부산에서 도전(출마)하시는 걸 보면서 저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나 했어요. 자신을 위한 결단이 아니었으니까요. 노 대통령이 제게 들려준 이 말씀을 좋아해요. ‘지도자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가 뭔 줄 아냐? 생각은 거의 같지만 지도자는 자기 손해를 무릅쓰고 실천하는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은 손해를 무릅쓰지 않는 사람이지.’”
- 그래서 스승이라고 하는 거군요.
“‘인간은 다 오류를 범하지만 오류를 발견할 촉수가 있느냐, 수정할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이행한 분이셨어요. 또 대통령 취임 후에는 절대 독대를 안 하셨어요. 특정 정보에 흔들리지 않으려 어떤 사안이 있으면 늘 찬반 양측을 불러 질문을 던짐으로써 본질에 다가가려 하셨죠. 진영논리에서도 벗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을 결단하고 경쟁자였던 진보·보수 인사를 장관에 임명하셨어요. 유시민·진대제 장관도 들이셨고요.”
그는 인수위 시절의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인수위와 몇몇 팀이 짠 장관 후보 명단을 보고 제가 당선자 신분인 노 대통령을 찾아가 몇몇 후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일이 있었어요. 2시간쯤 지나자 버럭 화를 내시며 ‘야, 내가 인사권자야, 그만해’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찍 부르시더니 ‘너와 헤어진 후 생각해봤는데, 이 부분은 타당성 있으니 이 사람은 재검토. 하지만 이 사람은 너의 논리보다는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으니 밀고 가겠다’ 하시는 거예요. 너무 놀랐어요. 존경스러웠고요.”
- 안희정 전 충남지사 면회(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돼 2019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는 했나요. ‘좌희정 우광재’로 불릴 정도로 오랜 동지이자 친구인데….
“가족은 보는데, 안 지사 면회는 안 갔어요.”
- 왜요.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이니까요. 안 지사가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뎌내 다시 또 생명을 준비하는 넉넉한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어요.”
- 문재인 대통령의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있어요. 조국 사태와 부동산정책 실패 등으로 비판을 받았어요.
“베버에 의하면 책임원리를 갖고 정치하는 사람과 신념원리를 갖고 정치하는 사람이 있어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책임원리에 충실한 문제해결형이에요. 오류가 있으면 정책방향을 바꾸고 그것이 상대에 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반면 문 정부의 일부 인사는 신념원리가 강해 내가 옳고 상대는 틀리다고 생각해요. 방향 수정이나 타협이 쉽지 않죠. 우리 사회는 신념원리와 책임원리가 조화된 리더십이 필요해요.”
- 문 정부 비판이네요.
“아니죠. 문 정부에서 중요 직책을 맡았던 시민단체 출신의 몇몇 대표적인 분들 이야기예요(그는 해당 인사가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인터뷰 말미, 이 의원은 “노 대통령이 생전에 말씀하셨듯, 저 역시 시련과 실패를 겪고 어려운 점도 많지만 의지를 갖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엔 “(정치라는) 허업의 바다가 아니고 인류에게 도움 되는 담대한 희망의 씨앗을 심자”라고 쓰여 있다.
https://ift.tt/3yhLVU2
대한민국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이광재 “이번 대선에서 사조직 캠프 최소화, 노무현의 '정치벤처' 재개할 것” - 경향신문"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