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그룹인 듀스 시절의 김성재. 타살 가능성을 적시한 국과수의 부검감정서가 통보됐음에도 당시 경찰은 여전히 사고사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한겨레 자료
▶등장인물 K 김성재 여자친구 L 김성재 매니저 육미승 김성재 어머니 정희선 국과수 약독물과장 안원식 서울서부지청 검사
연재 순서 ① 운명의 밤 ② 오른팔의 주사자국 ③ 누가 부검을 반대했나 ④ 진정서와 동물마취제
“작년인가 한창 성재가 마약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러지 말라고 얘길 하다가 다투기도 했었어요.” 1995년 11월22일, 첫 경찰조사에서 여자친구인 K는 이렇게 진술했다. 당시 경찰은 28개 주사자국을 마약 투약 흔적으로 보고 같이 투숙한 일행 중 누군가가 주사를 놔주다 사망에 이른 것으로 의심했다. 이튿날인 23일 경찰은 로드매니저 L를 불러 두번째 조사를 벌였다. 처음 발견 시점과 관련해 L의 진술은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었다. 앞서 L은 경찰조사에서 20일 새벽 6시께 처음 거실에 엎드려 있는 성재를 깨웠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현도는 이보다 앞선 새벽 5시께 성재 숙소로 전화해 L과 통화할 때 L이 성재를 깨웠는데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 것을 기억했다.1) L이 성재를 처음 발견했다고 한 시점보다 1시간 가량 앞선 때다. 이현도의 기억이 맞다면 새벽 5시에 한 번 깨웠고 이후 6시에 또다시 깨웠는데 결국 안 일어나 6시40분께 신고한 것이 된다.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 무렵, 언론과 경찰 쪽에서 성재 죽음이 ‘마약에 의한 것’이라고 심증을 굳혀가고 있다는 얘길 전해 들은 유족과 기획사, 이현도 쪽은 분노했다. 소속사 김동구 대표는 항의 차원에서 삭발한 뒤 이날 육미승과 빈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성재의 마약 복용 의혹에 강하게 반발했다. 성재 빈소에는 팬을 비롯해 동료 연예인 등 문상객이 끊이지 않았다. 신동엽, 룰라, 김종서, 장혜진, 구본승 등 생전에 성재와 가까웠던 연예인들도 빈소를 지켰다. 친구와 동료들, 그리고 팬들의 눈물 속에 장례가 끝나가고 있었다. 성재를 화장하는 날은 몹시 추웠다. 예보에도 없던 눈이 내렸다. 11월25일 토요일이었다. 서울 여의도 SBS 앞에서 노제를 치른 뒤 경기도 고양시 벽제로 향했다. 화장하는데 3~4시간이 걸렸다. 장례행렬은 장지인 경북 문경새재로 이동했다. 성재가 언젠가 살고 싶다던 곳이었다. K도 그날 함께 했다. 장지로 가는 길에 성재가 오른손잡이가 아니고 왼손잡이라는 등의 얘길 문상객들에게 했다.2)
1995년 11월25일 토요일, 김성재 장례 운구행렬이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화장된 주검은 고인이 살고 싶어했던 문경새재에 뿌려졌다. 한겨레 자료
새재에 도착한 것은 반나절이 지난 늦은 밤이었다. 소백산맥 중산간에 들어서자 너른 터가 나타났다. 별빛이 찬연했다. 성욱이 유골함을 들고 언덕배기에 섰다. 육미승과 유족들이 뼛가루를 한 줌 집어 허공에 뿌렸다. K와 친구들의 순서였다. 뼛가루는 흰 그림자가 되어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팬들이 울먹였다. 육미승도 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장례는 끝이 났지만 사건 발생 일주일이 돼가도록 경찰은 수사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행적이 의심스럽다는 제보를 받고 세차례나 조사를 벌였지만, 뚜렷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전히 경찰은 28개 주사자국으로 미뤄, 약물 사고사로 기울어있었다. 타살 가능성에 대한 수사가 도외시된 이유였다.
경찰이 사고사라는 육감에 매몰돼 있을 때, 국과수에선 김성재가 일반적인 마약으로 숨진 게 아니라는 쪽으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의뢰된 소변과 혈액, 머리카락에 대한 마약 반응 검사결과가 음성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앗, 이거구나!” 국과수 정희선 약독물과장이 드디어 김성재 몸에 있던 물질의 정체를 알아냈다. 11월29일 수요일이었다. 8일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5만 화합물, 10만 화합물까지 범위를 넓힌 끝에 찾아낸 것이었다. 먼저 밝혀낸 것은 틸레타민이라는 이름의 동물마취제였다. 두번째 물질은 신경안정제로 널리 쓰이는 졸라제팜이었다. 두 물질은 절반씩 희석돼 ‘졸레틸50’이라는 이름으로 동물병원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수의사협회에서 제품을 받아 실험했더니 김성재씨의 혈액, 소변에서 나온 성분과 일치했다. 혈액 1ml에서 틸레타민 0.85μg(마이크로그램. 1/1,000,000그램을 의미)이 검출됐고, 졸라제팜은 3.25μg이 검출됐다.
수백여 차례 실험 끝에 김성재 몸에서 ‘졸레틸’을 발견해낸 당시 국과수 정희선 약독물과장. 사건해결의 결정적 실마리는 경찰이 아닌 국과수로부터 나왔다. MBC 방송화면 갈무리
사실 경찰 의뢰사항은 마약 검출 여부였다. 팔에도 주사 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동물마취제라도 마약 남용 가능성이 있는지, 남용사례가 있는지 찾아야 했다. 동물마취제를 남용 목적으로 사용하다 사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문헌을 뒤져도 국내외 남용사례를 찾기 어려웠다. 알고 지내던 미국 마약수사청 연구원에게도 팩스로 문의했다. 미국에선 같은 성분인 테라졸이 약물 규제 목록에 포함돼 있지만 밀수한 사례도, 남용한 사례도 없다는 답이 왔다. 어떤 이유로 사망자에게 투여됐을까. 의문은 더욱 커졌다. 마약검사결과와 함께 김성재 몸에서 졸레틸50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아직 외부에 통보되지 않았다. 12월1일 금요일 오후, K가 여의도 S아파트 부근 공중전화부스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K의 운명을 가를 전화였다. K의 이날 행적은 공판과정에서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선생님, 저 잠깐 만나 뵙고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K가 수화기 너머 한 남성에게 말했다. “누구시죠?” “만나면 누군지 알 겁니다.”3) K가 의문의 남자에게 전화를 걸던 그 시각, 정희선에게서 분석 결과를 전달받은 부검의 김광훈이 다음과 같은 부검감정서를 작성했다. “△주사침흔이 오른쪽 상지에 국한되어 있는 점 △주사침흔의 분포는 불규칙적이나 상지 정맥혈관 주행을 따라 주사하려고 노력한 소견을 보이는 점 △본시(本屍)의 경우 평소 오른손잡이였다고 하며, 이 경우 본인이 직접 주사하기는 매우 어려운 점 △본시(本屍)의 발견당시 주위에 주사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 △다수(28개소)의 주사침흔이 있는 점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약물이 투여된 점 등으로 판단할 때 타살(他殺)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움.”
국과수가 작성한 김성재 부검감정서. 여섯가지 근거로 타살 가능성을 적시하고 있다. 현장에서 주사기가 발견되지 않은 점은, 누군가 주사기를 치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사고사 가능성이 희박함을 보여주는 또다른 정황이었다. 유족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2월3일 밤, 육미승은 김성재 죽음의 의혹을 보도한 KBS 시사프로 <추적 60분>을 보다 놀랐다. ‘추적 60분’은 구체적인 약물명을 밝히지 않은 채 국과수 정밀검사를 바탕으로 “김성재가 투약한 약물은…국내 마약환자들에게서 발견되지 않은 신종마약이다. 김성재는 마약 투약과 관련해 사망했다”고 결론내렸다. 명백한 오보였다. 성재를 마약중독자로 단정하는 방송을 본 육미승은 참을 수 없었다. 편견에 사로잡힌 경찰 수사와 언론의 무책임한 추측보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육미승은 행동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12월4일 월요일, 육미승은 KBS를 상대로 정정보도 요청4)을 낸 뒤, 서울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타살 의혹과 관련해 듣고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육미승은 사건 이후 K가 보여준 언행을 복기하면서 짙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육미승은 변호사가 작성한 진정서를 이날 곧바로 서울지검 서부지청 안원식 검사 앞으로 접수시켰다. 일본 출국 소문이 돌고 있던 K에 대해 출국금지 요청과 함께 그녀를 살인혐의로 수사해달라는 것과, 성재의 억울한 죽음을 제대로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안이한 경찰 수사를 뒤바꿔 놓은 육미승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사고사로 잠정 결론냈던 경찰수사 방향을 타살 가능성으로 전환하게 만든 것은, 12월4일 김성재의 어머니 육미승이 검찰에 낸 진정서 때문이었다. 빈소에서 육미승이 아들의 마약투약 의혹을 반박하고 있다. SBS 방송화면 갈무리
경찰 수사가 미덥지 않은 점도 육미승이 검찰에 진정서를 낸 이유였다. 주부인 육미승이 보기에도 경찰의 초동수사는 부실했다. 호텔에 있던 일행들은 11월20일 점심 무렵 스위스그랜드호텔에 출동한 경찰이 현장보존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흘 후에 다시 나타난 경찰은 성재가 누워있던 소파 뒤쪽을 한번 뒤져보고 갔다고 했다. 12월5일 화요일, 타살 가능성이 적시된 국과수 부검감정서가 서부서에 통보됐다. 국과수 내부결재를 거쳐 서부서에 접수되기까지 4일이 걸린 것이었다. 출입기자들에게 부검 결과가 알려진 것은 오후였다. 곧바로 김성재 몸에서 동물마취제인 졸레틸 성분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타전됐지만, 여전히 경찰은 타살보다 사고사에 수사의 방점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서부지청 안원식 검사는 전날(4일) 접수된 진정서와 이날 전달된 부검감정서를 검토하면서 김성재 변사사건을 전면 재수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있었다. 형사부에서 잔뼈가 굵은 안원식은 본능적으로 타살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느꼈다. 이날 K와 매니저 L에 대해 출국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사건 발생 보름만에 수사는 다른 국면을 맞고 있었다. 12월6일 수요일, 육미승은 뉴스를 보고 경악했다. 전날(5일), 성재로 빙의한 박수무당이 말한 ‘동물마취제’가 부검결과 진짜로 성재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성재 넋을 달래야 한다는 지인들의 권유에 육미승은 마지못해 진혼제를 승낙했고 이날 서울 공덕동 점집에서 굿을 벌였더랬다. 육미승이 박수무당에게 “어떻게 죽였냐”고 묻자 그는 “주사기에 약을 넣어서”라고 답했다. 이에 육미승이 “무슨 주사약이냐?”고 되묻자 “동물에 쓰는 마취제”라고 답했다.5)
부검 결과 김성재의 몸에서 검출된 동물마취제 ‘졸레틸50’. 마취성분인 틸레타민과 신경안정제인 졸라제팜이 절반씩 섞인 채로 희석액과 함께 시판됐다. 당시 동물병원에서 수술시 사용됐으나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물질이었다. 한겨레 자료
이날 무당은 진혼제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성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얘기들을 건넸다. 몸이 아픈 친구에겐 “야, 너 건강이 안 좋아서 어쩌니? 걱정마. 도와줄게”라고 했고, 사업하는 선배에겐 “형은 너무 스케일이 커서 탈이야. 하지만 좀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했다. 넘겨짚을 수 없는 구체적 언술 앞에서 지인들과 육미승은 몸서리를 쳤다. 그것은 정녕 성재의 넋이었을까. 생각할수록 기이한 일이었다. 12월7일 목요일 오후, 한 남자가 반포파출소에 전화해 김성재 사건과 관련해 제보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 방향을 넘어 한 사람의 삶을 뒤바꿔 놓은 결정적 제보였다. 오승훈 <한겨레> 기자
vino@hani.co.kr
각주 1. 이현도, <스물네 살의 사자후>, 예당미디어, 1997 2. 육미승, <말하자면>, 위미디어, 1998. 경찰·검찰 조사와 공판에서 K는 김성재가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목격해 이렇게 말했다고 진술했다. 3. 배○○ 경찰·검찰 진술 4. 훗날 육미승은 KBS로부터 정정보도와 사과를 받아냈다. 5. 육미승, 위의 책. 육미승은 검찰조사에서 안원식 검사에게 진혼제 얘기를 하며 무당이 범인을 지목했다고 말했지만, 안 검사는 “비과학적이라 증거채택이 안 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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