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가운데 지난해 10월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각계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노동시간 단축조치 등을 담은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절대 쓰러질 순 없어. 강해지자고, 앞만 보고 달려가자고~.” 얼마 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직장인들이 들으면 가장 울컥해하는 노래라며 소개된 곡이다. 직장이든 학교든 언제나 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건강하고 강한 몸, 강한 정신을 강조한다. 약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한국인은 늘 강해야 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강한 한국인, 불굴의 한국인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이와 달리 건강지표는 괴상하다. 한국인은 건강에 대한 객관적 지표는 높은데, 주관적 지표는 꼴찌다. 객관적 건강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기대수명(해당연도 출생아가 앞으로 살 것으로 기대하는 햇수)을 보면, 한국의 경우 82.7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80.7년보다 2년 더 길다. 그런데 주관적 건강 평가 결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을 보면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은 80~90%, 오이시디 평균은 67.9%다. 이에 견줘 한국인은 32%에 머물고, 40% 이하인 곳은 조사 대상 35개국 가운데 한국과 일본뿐이다.(OECD 건강 통계 2020) 이 통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고, 일부에서는 우리 사회 건강염려증이 유난하다며 비아냥대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건강염려증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건강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은 게 문제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흔히 ‘건강하다’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일까. 세계보건기구(WHO)는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영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를 건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런 건강 규정은 지향일 수는 있을지언정, 기준이 너무 높아서 변별력도 없고 현실성도 떨어진다. 통상 사회적으로 합의된 ‘건강하다’는 기준은 사회생활이나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는 상태일 것이다.
한국인이 ‘무리가 없는 상태’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계에서 손꼽히는 노동시간, 노동강도, 치열한 경쟁,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을 너끈히 견뎌내려면 웬만한 체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알다시피 한국은 노동시간이 길다. 독일보다 1년에 26일 정도를 더 일하고 일본보다 12일 더 일한다.(OECD 노동력 통계 2020) 과로가 일상인 현실이라 ‘과로사’ 뉴스가 나와도 주목받지 못한다. 주변에 과로와 번아웃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넘친다. 젊은이들은 오늘도 ‘영혼까지 탈곡’ 당하고 퇴근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한국인에게 출퇴근은 과로와 죽음(死)의 사이를 아슬하게 오가는 일이다. 언어는 사회문화를 반영한다는 명제를 이토록 정확히 반영하는 현실이 또 있을까. ‘과로사’라는 개념은 한국, 일본, 대만, 홍콩 정도에만 있다고 한다(앞서 봤듯 주관적 건강지표가 가장 낮은 국가 또한 한국과 일본이다. 대만과 홍콩은 오이시디 가입국이 아니라서 해당 통계에 없다). 게다가 너무 흔해서 뉴스에서 많이 다루지도 않는 ‘과로사’이건만, 영어사전에는 과로사라는 고유한 명사는 없고, 과로사의 일본어(Karoshi·가로시)가 등록되어 있다. 물론 영어권이라고 과로사가 없지 않겠지만, 재벌(Chaebol)과 화병(Hwa-byung)처럼 특수한 현상으로 인식되는 것일 게다. 아침에 상쾌한 몸 상태로 출근하는 직장인은 얼마나 될까. 핏기 없는 얼굴로 일을 하고 있으면, 상사는 겨우 며칠 야근했다고 축 처져 있냐고 한다. 며칠 야근을 했으면 피곤한 게 당연한데, 더 건강하지 못한 것을 나무란다. ‘라떼’는 주 6일 근무였고, 일요일까지 야근한 날이 부지기수라고 말한다. 회사 연수에서 강사는 ‘프로는 아프지 않다’고 말한다. 직장인을 위한 자기계발서는 건강 관리도 실력이고, 아프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업무를 수행해내는 게 21세기 인재라고 말한다. ‘계발’(啓發)을 잠재된 것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할 때, 잠재적 체력까지 채굴해서 모조리 쓰라는 의미인 것 같다. 그렇게 일한 결과로 한국 사회는 과로사라는 말을 개발(開發)하게 됐다. 동료는 헛개나무 추출물이 든 음료를 갖다주며 피로는 간 때문이라고 말한다. 피로는 간 때문이 아니라, 과로 때문이라고 정정해주고 싶지만 그 기운도 아끼고 싶다. 회사는 야근을 줄이기보다는 야근에도 너끈할 수 있도록 더 건강해지라고 채근한다.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니, 피로회복제로라도 몸을 깨워서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다. 건강도 스펙인 사회에서 뛰어난 인재(人才)가 되라는 채찍질이, 과로사라는 인재(人災)를 낳고 있다. 건강하다는 것을 ‘직장생활에 무리가 없는 상태’라고 할 때, 한국처럼 노동시간이 길고 강도가 높은 사회에서는 ‘정상 노동자’로서 개인이 갖춰야 할 건강의 기준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노동자 개인이 가져야 할 건강 기준이 올라가면 기업은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며칠 야근을 하고도 출근할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아픈 몸을 자책하며 녹즙과 영양제를 털어 넣는다. 기업은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노동자를 더 뽑는 투자도 안 할 뿐 아니라, 노동자 건강을 위한 ‘투자’도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가 한다. 이따금 상상해본다. 한국의 주 5일 표준적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할 수 없는 아픈 나의 몸이, 다른 사회에 있다면 어떨까. 나는 하루 6시간 주 3일 정도 노동이 가능한 몸이라,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는 ‘무척 불건강한 매우 열등한 몸’이다. 그런데 만약 하루 6시간 노동 실험을 하고 있는 스웨덴 같은 사회라면 어떨까? 과로사라는 말도 없고, 오히려 사람이 왜 직장에서 일하다가 죽게 되는 거냐고 의아해하는 사회. 개별 노동자가 갖춰야 할 건강의 기준이 낮은 사회라면 나의 몸은 직장생활을 하기에 ‘약간 불건강한 다소 열등한 몸’ 정도의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야근을 견디는 강철체력의 몸을 누가 강조하고 있는지, 그런 건강의 강조로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지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의료산업 또한 건강에 대한 기준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곤도 마코토 등 일본의 의료 전문가들이 쓴 <건강의 배신>은 의료자본이 정상 수치의 기준을 과도하게 높임으로써 더 많은 약물을 판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의료화된 ‘정상 몸’의 기준은 점점 세분화되고 높아지고 있다. 넘치는 건강보조제 광고를 보고 있으면, 비타민이나 마그네슘을 안 먹어서 아픈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자본뿐 아니라 애초 권력이 그렇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에 병원을 짓고, 서구에서 온 선교사들이 우량아 선발대회를 하며 ‘표준의 신체’를 구성하고 강조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한국인의 주관적 건강 지표가 낮은 것은 건강염려증 때문이 아니라, 기이하게 치솟은 집값처럼 비정상적으로 치솟은 건강에 대한 높은 문화적 기준 때문이라고 본다. 게다가 애초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높은 것도, 정부가 안전한 노동 환경 감시나 공공의료 강화 등으로 국민 건강을 위해 노력한 결과로 보기 어렵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사회 구조는 개인이 전투적으로 건강을 관리하게 만든다. 각자도생 사회의 생존을 위한 결과인 셈이다. 시민들은 영혼을 탈곡하며 번 돈을 건강관리에 쏟아붓는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 유난하다는 소위 건강염려증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오래 사는 게 두렵다고 말한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빈곤 혹은 빈곤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과로를 해야 하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주변을 보면 모두가 목에 숨이 차게 살고 있다. 그럼에도 아프고 힘들다고 말하기 어려워한다. 앞서 말했듯 높은 건강 기준이 문제고 너무 많이 일해서 아픈 것인데도, 건강을 해치는 원인을 문제 삼기보다, 그 결과인 아픈 몸을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높은 건강 기준, 과도하게 강한 몸을 표준의 몸으로 설정하는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해 수치심, 게으름, 자기관리 실패 등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한다. 글의 도입에서 말했던, 가수 마야의 노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절대로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외치면 돼.” 약해지고 뒤처지면 안 되고, 자신의 몸을 무시한 채, 무쇠팔 무쇠다리가 되어서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애초 누구의 목소리였나. 아파도 괜찮은 사회,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로 한 걸음 다가서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과도하게 높은 건강 기준을 해체하고, 무조건 강해져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바꾸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을 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문화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본이 건강의 기준을 높이는 사회에서는 그게 성숙함이기보다는, 결과적으로 자본의 논리에 부응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 시대에는 오히려 아프고 힘들다고 말하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성숙한 태도로 보인다. 고통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때, 건강의 기준이 올바르게 재조정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 여성, 평화, 장애 관련 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페미니스트. 국제 현장 연대 활동에서 건강이 손상된 뒤 투병 경험을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다. 알티브이(RTV) 시사다큐 <나는 장애인이다>와 여러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공저로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비거닝> <포스트 코로나 사회>가 있다. 아픈 몸을 둘러싼 사회·경제·정치적 문제를 다룬다.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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