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OO씨가 팀장님한테 업무 외적으로 말도 걸고 해서 사무실 분위기 좀 띄워줄걸 기대했는데 기대 이하네요.” “웃음소리가 안 들리면 힘이 안 난다며 비위를 맞춰줄 것을 요구했어요.” “심기노동은 여성에게 기본값입니다. 그 누구도 강요 안 하지만 안 하면 이상한 직원이 되는 거예요.”
회사 행사 꽃다발 준비는 여성 하급자 직원이 담당, 상사의 커피 심부름을 여성 하급자에게 시키는 관행, 업무 매뉴얼로 화장 등 외모 관리 요구. 남녀고용평등법 등으로 규율하기 어렵고 법에서 말하는 성희롱도 아니어서 당사자의 고충이 해결되지 않는 사무실 안 ‘철의 영역’들이다. ‘조직문화’라는 말로 직장에 뿌리박힌 성차별적 관행을 뽑아내기 위해 이런 행위들을 ‘심기노동’ ‘감정수발 노동’이라는 명칭으로 구체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다.
22일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성차별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토론회 ‘그 안에 성폭력을 야기하는 성차별 조직문화가 있다’를 유튜브로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지난 11월 온라인으로 실시한 ‘직장내 성차별 문화, 성희롱·성폭력 설문조사'를 발표했다. 조사에 참여한 520명 중 여성 482명의 표본을 분석했다. 32가지 문항으로 구성된 이 조사를 집계한 결과, ‘우리 회사는 상사의 심기를 파악할 것을 여성에게 요구한다'에 긍정답변(그렇다 또는 매우 그렇다)을 한 응답자는 39.6%, ‘우리 회사는 여성에게 사내 분위기 조성을 요구한다’에 대한 긍정답변은 34.6%, ‘우리 회사는 외모에 대한 평가를 한다'에 대한 긍정답변은 56.5%, ‘우리 회사는 상사를 위한 사적 수발을 여성에게 요구한다'에 대한 긍정답변은 26.4%였다. 조사에서 참여자들은 최근 3년 간 겪은 직장 내 성차별적 고충들이 여럿 기술했다.
“사근사근해야 할 것을 강요 당하고, 해야할 말을 할 경우 기가 세다는 소리를 듣는다.” “복수의 상사가 일상적으로 직원들 외모품평을 자주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상사가 전날 과음하면 아침에 속 풀어줄 음식(라면 등)을 준비해야 한다.” “아침마다 올라오는 길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심부름을 굳이 여자직원에게 시킨다. 여자니까 잘 알 것이라며 가족 기념일 물품을 사오게 한다.”
발제자로 나선 장주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연구원은 “서울시장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비서의 업무는 시장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었다. 심기를 보좌하는 방법으로 여성 직원에게 왜곡된 성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은 잘못된 조직문화로 ‘심기 노동’, ‘감정수발 노동’으로 따로 명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연구원은 “이는 비서직 업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터에 만연하게 퍼져있다”고 했다. 앞서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은 성폭력을 조장하고 방조하고 묵인하는 구조와 문화가 조직 내 있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성차별적 조직문화로 인한 고충에도 ‘심기노동’이란 이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상에서 받는 외모 관리에 대한 압박을 ‘꾸밈노동’으로, 서비스 종사자들의 스트레스를 ‘감정노동’으로 명명하며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났듯 조직내 성차별적 괴롭힘은 묵인할 관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성희롱도 한때 조직문화로 인식됐지만 지금은 법에 의해 규제되고 처벌의 대상이 되는 행위다. 보이지 않는 젠더 괴롭힘을 조직문화로 인식하지 않고 이름을 찾아 문제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설문조사는 성차별적 조직운영에 대한 사례도 접수 받았다. ‘우리 회사는 여성에게는 주요 업무가 아닌 보조업무를 배치하는 관행이 있다’, ‘우리 회사는 남성중심적인 비공식적인 통로(흡연, 술자리 등)에서 회사정보가 유통된다’ 등의 항목에 대해 묻고 관련 사례를 기술하게 했다.
“동료는 여성이 더 많은데 상사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같은 경력, 같은 시기 입사여도 여성보다 남성의 승진이 더 빠르다.” “정규직 전환시 암묵적으로 기혼 남자가 더 유리하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그 상태 그대로 진지한 이야기로 이어져 오랫동안 자기(남성)들끼리 따로 말하는 경우가 많았고 친목에서 여자 직원은 배제되는 문화였습니다.” “술자리에 내가 가지 않았을 때 여자인 내 얘기를 한다거나, 회사에서 발주를 넣는 건 같이 중요한 이야기들을 남성들끼리만 나눈 채 전달이 되지 않았던 상황도 종종 있었다.” “대놓고 차별은 하지 않지만 진짜 밥그릇 싸움은 남자들끼리의 친목도모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승진 추천은 군대 후배를 밀어준다든지. 대놓고 성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가능한 사례는 없지만 아주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좁고 치사한 그 남자들의 세계.”
하지만 이같은 성차별적 조직문화를 규율할 방안이 마땅히 없다는 점도 토론자들은 지적했다. 현행 법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란, 고용 등의 관계에서 상대방이 원치 않는 성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성적 굴욕감이나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행위로 남녀고용평등법, 양성평등기본법 등으로 규율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성별 비하 발언은 성적 언동이 아니라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있지만 고용이나 기회에서의 명백한 차별만을 다룰 뿐이다. 성별로 인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직간접적 관행은 법으로 규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토론자로 참여한 여성학자 권수현씨는 “남성 직원이 일을 잘하면 ‘역시 남자를 뽑아야 해'라고 생각하고, 여성 직원이 간혹 실수하면 ‘역시 여자라서 저렇다'는 그릇된 인식도 하나의 조직문화로 이어져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직장내 성희롱과 직장내 괴롭힘법 등에 포함되지 않는 성차별 문화와 ‘심기노동’ 등을 규율할 ‘젠더괴롭힘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태임 인천여성노동자회 평등의전화 상담소장은 “외모품평 등은 사내 문화로서 치부되고, 성적 언동이 있어야만 성희롱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당사자의 고충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직장내 괴롭힘에도 포함되지 않고 성희롱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이런 심기노동을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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