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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무능과 '뱅크런' 부른 IMF 오판, 그리고 벼랑 끝 국민들 - 한겨레

[한겨레S] 기획 : 20년 만의 IMF 기밀해제 ③ 빗나간 구제금융 화살
고금리 · 금융구조조정 독으로 작용, 2차 구제금융과 노동자 희생 불러
‘텅 빈 외환’ 극비 문서 유출도 한몫…무능한 정부·한은, 무책임으로 일관
1998년 1월 문경은(왼쪽 첫째), 정은순(왼쪽 둘째) 등 스포츠 스타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1월 문경은(왼쪽 첫째), 정은순(왼쪽 둘째) 등 스포츠 스타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새 정부는 아이엠에프(IMF·국제통화기금) 협약을 100% 준수하게 될 것입니다.” 1997년 12월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데이비드 립턴 재무차관 등 미국 대표단과 만나 이렇게 약속했다. 아이엠에프가 요구해온 노동자의 임금 삭감뿐 아니라 정리해고제까지 사실상 전면 수용하겠다는 뜻을 확인한 것이다. 아이엠에프와의 1차 구제금융 협약(12월3일) 뒤, 불과 20일도 안 돼 외환보유고가 다시 바닥을 드러낸 시점이었다. 추가 구제금융(IMF플러스·12월24일)이 절실했던 김 당선자는 “경제를 강화하는 유일한 길은 아이엠에프 요구를 이행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시민단체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아이엠에프 정보공개를 통해 얻어낸 기밀자료 파일 묶음 ‘아이엠에프컬렉션: 한국의 위기(Korean Crisis)’를 보면, 김영삼 정부의 무책임한 경제 정책으로 촉발된 한국의 외환위기는 아이엠에프의 초기 정책 오판으로 또 한번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다. 2차 국가부도 위기였다. 추가 ‘뱅크런’ 부른 IMF 오판 아이엠에프는 애초 1차 구제금융 발표만으로 시장이 안정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엠에프가 요구한 고금리 정책과 금융 구조조정이 독이 됐다. 우선 고금리 정책과 금융 구조조정 여파로 신용경색이 발생하면서 12월5일 고려증권, 6일 한라그룹을 비롯해 기업 부도가 급증했다.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와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그달 10일과 11일 각각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정크본드’(투기등급 채권) 직전까지 하향 조정했고,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대출 회수로 자본이탈이 계속됐다. 반면 급속히 빠져나가는 돈에 비해 아이엠에프 자금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사태 악화의 더 큰 원인은 아이엠에프가 구제금융에 개입한 방식이 오히려 외국 투자자들에게 한국 경제가 구제불능으로 보이게 했다는 데 있다. 이는 아이엠에프가 구제금융 개입 과정에 저지른 실수 때문이었다. 아이엠에프 아시아태평양국의 12월17일 보고서를 보면, “투명성을 개선하려는 의도로 공개된 경제 프로그램 각서가 역효과를 낳았다. 두곳의 대형 시중은행이 폐쇄될 수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예금자들의 신뢰를 잃었고 뱅크런이 촉발됐다”고 인정하고 있다. 외환보유고는 12월18일 39억4천만달러까지 내려갔다. 환율마저 폭등해 며칠 뒤인 23일, 달러당 2천원을 돌파했다. 한국은 다시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1차 구제금융 직후 한국 외환보유고의 실상을 담은 아이엠에프 극비 문서가 국내 언론을 통해 유출된 것도 상황을 나쁜 쪽으로 흐르게 했다. 1997년 12월8일 <조선일보>는 워싱턴 특파원발 ‘아이엠에프 극비보고서 단독입수’라는 제목의 1면 기사에서 한국 외채가 1천억달러 이상이고, 이 가운데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외채가 54.8%이며, 한국은행 장부상 외환보유고는 이미 대부분 국내은행 해외 점포를 통해 소진됐다고 밝혔다. 문서는 12월5일 아이엠에프 이사회에 제출된 보고서였다. 한국의 실상을 알게 된 외국 투자자들은 경악했다. 이후 아이엠에프는 내부 보고서에서 “이사회 문서의 언론 유출 또한 매우 파괴적인 효과를 줬다. (…) 단기 부채를 막는 데 불충분한 아이엠에프의 지원자금 프로그램을 드러낸 내부 보고서 공개로 한국의 상환 능력에 의심이 커졌다”고 그 충격을 묘사한다. 당시 한국 쪽 김우석 재정경제원 국제금융증권심의관(국장)은 “(문서 유출이) 한국 금융시장의 심리와 한국 정부의 신뢰성을 손상했다”며 항의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아이엠에프가 책임을 지거나 본격적인 조사를 벌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사실 아이엠에프의 운영이 그다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도 않았다. 이에 주계영 당시 아이엠에프 재정국 자문관이 아이엠에프의 분석 자료 작성이나 정책 입안과 관련해 “의미있는 내부 검토를 할 (충분한) 기회가 결여됐다”고 비판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후 늦게까지 필요한 서류가 도착하지 않는데도, (직원들이) 다음날 오전 일찍 관련 코멘트를 내고, 정오까지 경영진에 의견을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진지한 내부 논쟁을 할 수 없다”고 그는 꼬집었다. 아이엠에프 처방이 부실했던 또 다른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1998년 1월, 김영삼 대통령(오른쪽)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청와대에서 국제통화기금(IMF) 협약이행 방안 등을 협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8년 1월, 김영삼 대통령(오른쪽)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청와대에서 국제통화기금(IMF) 협약이행 방안 등을 협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7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신청을 알리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자,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1997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신청을 알리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자,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구제금융 직전 정부는 ‘국민소득 1만달러’라는 허울을 지키려 한달 새 175억달러를 환율방어에 썼다. 옛날신문 갈무리.
구제금융 직전 정부는 ‘국민소득 1만달러’라는 허울을 지키려 한달 새 175억달러를 환율방어에 썼다. 옛날신문 갈무리.
“한국의 보유 외환 다 어디로 갔나” 아이엠에프의 부실한 대응 탓만은 아니다. 애초 위기를 키운 것은 바로 한국 정부였다. 정부는 1990년대 초반 해외자금 차입을 허용해달라는 재벌의 요구에 따라 자본시장을 점진적으로 자유화하고, 포화된 산업 분야에 기업의 중복 투자를 허용했다. 여신건전성 규제를 받지 않는 종합금융회사도 줄줄이 설립됐다. 1997년 초부터는 한보, 삼미, 진로, 기아 등 재벌그룹이 과도한 부채로 부도가 났지만 정치적 이유로 구조조정이 지연됐다. 한국 경제 신뢰도가 급락했고, 동남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자본이탈이 시작됐다. 국가부도 위기 앞에서도 부실한 대응은 계속됐다. 정부는 ‘국민소득 1만달러’라는 허울을 지키려 외환보유고를 무계획하게 소진하며 환율을 방어했다. 후베르트 나이스 아이엠에프 아시아태평양국장은 당시 “한국의 외환 사정이 예상보다 심각하다. 돈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은행이 (적어도 상당한 외환을) 외국은행의 단기 채무 상환에 썼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실제 한국은행이 환율방어와 종금사 등의 빚을 갚느라 소진한 외환이 11월1일부터 12월4일까지 175억달러나 됐다. 12월3일 외환보유고에는 50억달러만 남아 있었다. 정부의 혼선도 상황 악화를 거들었다. 애초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비밀리에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와 만나 지원을 요청한 뒤, 11월19일 금융안정대책과 함께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이날 아침 강 부총리를 경질했고, 임창열 신임부총리는 곧바로 아이엠에프 필요성을 부인했다. 아이엠에프 실사단의 방한은 연기되었고, 캉드쉬 총재의 금융안정대책 환영 성명도 취소됐다. 금융시장은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11일 오후 ‘고용·실업대책과 재벌개혁 및 아이엠에프 대응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경기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아이엠에프 재협상을 촉구하고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11일 오후 ‘고용·실업대책과 재벌개혁 및 아이엠에프 대응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경기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아이엠에프 재협상을 촉구하고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구제금융 직후 실직자들이 ‘아이엠에프 모임터’에서 취업정보지 등을 통해 구직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구제금융 직후 실직자들이 ‘아이엠에프 모임터’에서 취업정보지 등을 통해 구직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결국 한국은 12월24일 ‘아이엠에프 플러스’ 개혁을 약속하고 추가 금융 지원을 받아 겨우 부도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관료들의 헛발질은 계속됐다. 12월 말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금융개혁법안에는 장기채권 매입자의 개인정보를 일정 기간 비공개하는 금융실명제 유보 방안이 포함됐다. 통합 금융감독기관과 한국은행 운영을 재경원에 종속시키는 내용도 담겼다. 아이엠에프는 금융실명제 완화에 대해 “구제금융 협약 정신에 맞지 않는, 투명성으로부터의 후퇴”라는 우려를 전달했지만, 정부는 꿈쩍도 안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금융감독위원회가 국무총리 산하로, 금융통화위원회가 한국은행 산하로 이전된 것은 그나마 관치금융을 우려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요구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스탠리 피셔 아이엠에프 부총재는 1998년 1월 “한국이 아이엠에프와 상의 없이 재정긴축을 결정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한국 정부는 예상보다 조세수입이 줄자 “재정적자가 시장에 나쁜 신호를 줄 수 있다”며 정부 지출을 줄여 씀씀이를 맞추겠다고 계획한 것이다. 나이스 국장은 “긴축재정이 경제를 지나치게 위축시킬 수 있다. 만약 지출을 줄이려면, 절약된 재원을 ‘실업 충격 완화’ 등 사회지출에 쓰라”고 조언했지만, 그마저도 정부는 구조조정과 상충된다는 논리로 한동안 ‘청개구리 행태’를 보였다. 아이엠에프 내부 보고서는 당시 한국은행의 안일한 태도도 고스란히 증언한다. “한국 쪽이 일부 해외 채권은행에 채권 만기 연장을 요청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은행 총재는 유럽 출장 직전까지 독일 채권은행들과 만날 계획조차 없다.” 피셔가 받은 이 보고서는 “한국이 채권은행을 상대로 더 노력하라고 제안해야 할 것”이라고 끝맺는다. 정부는 1997~1998년 당시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의 조건이라며 기업과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이들이 고통받는 사이 정작 정부는 스스로의 책임과 구실을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지주형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지은이. 1997년 영국에서 공부를 시작한 직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 위기 및 한국 정치와 경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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