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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승인받은 노동자 산재, 기업은 막무가내 취소소송 - 한겨레

산재, 사업주 무과실 원칙인데
법적 근거 없는 소송 제기 잇따라
노동자 압박용 ‘아니면 말고’식
“헌법상 근로 권리 제한하는 행위
입법으로 소 제기 자격 한정해야”
한 산업재해 승인 신청자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 산업재해 승인 신청자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40대 직장인 ㄱ씨는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어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승인 신청을 해 지난해 10월 산재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회사가 올해 근로복지공단에 자신에 대한 산재 인정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회사는 부당해고 여부를 두고 ㄱ씨와 법적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ㄱ씨의 산재 인정이 회사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해 이런 소송을 낸 것이다. ㄱ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1년 동안 업무상 질병에 관한 각종 자료를 제출하고 전문가 심의까지 받아 산재를 인정받았는데, 회사쪽은 ‘증상이 과장됐을 것’이라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며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산재가 발생한 기업이 별다른 법적 근거도 없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승인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어, 어렵게 산재 인정을 받은 노동자들이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한겨레>가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받은 ‘사업주 제기 산재승인취소소송’ 현황 자료를 보면,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최근 5년 동안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이 노동자의 산재 승인을 취소해 달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제기한 소송은 연평균 51건(전년도 이월 소송 포함)에 달한다. 관련 소송은 2016년 45건에서 2017년 52건, 2018년 53건, 2019년 61건으로 계속 증가하다 2020년 45건으로 소폭 꺾였다. 계류 중인 소송을 제외한 118건 소송 가운데 회사쪽이 패소한 사건이 66건(55.9%)이고, 소송 중 취하한 사건이 42건(35.5%)으로 대부분 소득 없이 끝나지만 회사쪽의 소 제기 관행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원칙적으로 산재승인취소소송은 처분 당사자인 근로복지공단과 산재 신청자만 제기할 수 있다. 행정처분 관련 판례를 보면, 제3자에 해당하는 회사가 노동자의 산재 승인을 취소하도록 요구하려면 산재 승인으로 인해 회사쪽이 당하는 불이익(법률상 이익)을 명확히 제시해야 하고, 이때의 불이익은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 등이 아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불이익이어야 한다. 게다가 회사쪽의 산재승인취소소송은 법률적 근거도 미미하다. 우선 산재보상 제도 자체가 사업주 과실을 문제 삼지 않는 ‘무과실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어 사업주가 주장하는 피해가 법원에서 인정될 여지가 적다. 사업주들은 산재 승인으로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이 강화된다거나 산재 승인 노동자가 민사소송을 제기할 가능성 커진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행정소송법과 관련 판례에서 정하는 직접적·구체적 이익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한때 회사쪽이 ‘노동자의 산재 승인 건수가 회사의 산재보험료율 책정 근거가 된다’는 과거 대법원 판례(87누176)를 근거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2018년 말 업무상 질병 산재를 보험료율 책정 근거로 삼지 못하도록 산재보험료징수법이 개정된 뒤로는 이런 근거도 더는 법적 실효성이 없다. 2018년 서울고등법원도 삼성물산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노동자 산재 취소 소송에서 사업주의 소송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사건을 각하했다. 그런데도 현장에선 회사쪽의 ‘아니면 말고’식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소송이 최종 각하되더라도 소송 과정에서 노동자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 하급심 재판부가 소송을 각하하지 않고 사건을 심리하는 경향도 작용한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2018년 고법 판례에 입각해 회사쪽의 소송 제기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하급심 재판부가 (소송 제기 자격이 있다는) 회사쪽 주장을 받아들여 2심, 3심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결국 노동자는 기나긴 싸움 끝에 산재를 인정받고도 또다시 이를 취소당할 위기에 처하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근로복지공단의 설명을 보면, 지난해 업무상 질병 산업재해 노동자 가운데 근로복지공단의 인정을 받은 경우는 10명 중 6명에 그친다. 과로에 의한 뇌출혈로 사망한 택시기사 ㄴ씨의 유족도 2018년 재판부 조정권고로 사망 3년 만에 산재를 어렵게 인정받았으나, 회사로부터 산재승인취소소송을 당해 다시 법정에 서야 했다. 당시 ㄴ씨 사건을 맡은 조애진 변호사는 “유족이 다시 변호사를 선임해야 했고 혹시라도 회사쪽이 승소해 이제까지 받은 유족급여를 모두 반환해야 할까봐 정신적 압박감도 컸다”며 “회사가 처음부터 ㄴ씨 산재 승인에 불리한 각종 자료를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하더니 소송까지 벌여 재해자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거나 소송 남발을 막을 수 있는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지선 법무법인 마중 변호사는 “재판부의 각하 판례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이를 더 쌓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노동자의 산재 승인 자체로는 사업주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이 가지 않는다는 취지로 정부가 행정해석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산재 노동자가 오랜 심사를 통해 얻은 권리를 송사로 엎는 것은 헌법상 근로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라며 “입법으로 산재 승인 처분에 대한 소송 제기 자격을 당사자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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