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만든 어린이 보드게임 ‘모을까? 불릴까? 금융탐험대’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겨레S] 스페셜 스토리 돈 배우는 아이들 지난 6월, 제주 서귀포시 한 어린이집 교실에 작은 시장이 열렸다. 어린이들은 직접 현금으로 물건을 사 장바구니에 담으며 시장경제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수업을 했다. 3~7살 나이의 원아들은 평소 바른 생활을 할 때 동전으로 칭찬을 받는데, 이 돈을 모아 두달에 한번씩 시장에서 원하는 걸 살 수 있다. 7살 아이들은 채소가게, 간식가게, 잡화점, 문구점 등 상점의 주인 역할을 맡아 매대에 상품을 올려놓고 직접 파는 경험을 했다. 고영란 원장은 “유아들이 ‘돈’이라는 매개체를 이해할 수 있는 수업”이라며 “살아보니 어릴 적부터 경제관념을 형성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 수업에 접목시켰다. 수 개념을 이해하고 경제교육을 병행할 수 있어 유익하다”고 말했다. 부산의 한 초등학교 교실. 이곳은 시장경제 체제를 교실 안에 들여왔다. 부산 송수초교 옥효진 교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세금 내는 아이들’은 영상에서 “이 교실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라고 설명한다. 학생들은 제각각 직업을 가지며 가상화폐 ‘미소’로 월급을 받는다. 은행원, 급식 도우미, 공무원, 청소부, 투자회사 직원부터 국세청장, 신용등급 위원, 국무총리까지 직업은 현실적이고 다양하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돈을 벌고, 예금에 가입하고, 세금을 내고, 주식도 하고, 사업도 하고, 부동산도 구매한다. 선생님 몸무게가 오를 것인지 내릴 것인지와 연동된 투자상품도 사고판다. 옥 교사는 직접 임금체불 상황을 설정해보기도 한다. 채널은 지난해 2월 시작해 어느새 구독자 10만명을 확보했다.
제주 한 어린이집에서 지난달 시장놀이를 하는 모습. 어린이집 제공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초중고교 등 요즘 교육 현장에는 어릴 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해하도록 ‘돈’과 관련한 교육을 현실적으로 하는 교사들이 생겨나고 있다. 왜 이런 교육 방식을 시도할까. 옥효진 교사는 <한겨레>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경제·금융 지식이 없어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른이 되었고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그는 “12년의 공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면 기본적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식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방식을 교육 현장에 도입했다”고 덧붙였다. 학부모들도 이런 시장경제 교육에 대체로 찬성하는 편이다. 학기 초 학부모 총회나 가정통신문, 안내문 등을 통해 학급에서 이런 활동이 이루어짐을 학부모들에게 안내하면, 응원도 보내온다. 옥 교사는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 없이는 원하는 것들을 해나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 만큼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펼치는 데 경제·금융 지식의 부재가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부산 송수초교 옥효진 교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세금 내는 아이들’ 모습. 유튜브 화면 갈무리
유튜브 채널에 대한 반응도 긍정적이다. 영상에 달린 댓글들은 “좋은 학습모델인 것 같습니다”, “경제관념은 웬만해서는 학교에서 못 배우는데 정말 유익할 거 같네요”, “나도 초딩 때 저런 교육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내용이 이어졌다. 시장경제 교육모델이 호응을 얻는 이유는 교육열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정작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돈에 관한 교육이 부재했다고 느끼는 성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초중고교 시절 경제·금융 교육의 부재로 성인이 된 뒤 실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는 설문조사도 있다. 금융위원회 ‘금융교육 실태조사 보고서’(2019년)를 보면, 19살 이상 성인 100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9명(92.4%)은 금융교육을 수강한 경험이 없다고 응답했다. 평소 금융지식이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는 상황은 ‘주택·생활·사업 자금 등 대출 필요시’(24.3%)가 가장 많았고 이어 ‘주식투자, 펀드나 보험 가입 등 자산 관리 시’(19.4%), ‘은퇴 후 재무설계 필요시’(14.9%) 등의 차례였다.
고 원장과 옥 교사의 교육관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낮은 노동소득과 집값 폭등의 시대를 살고 있는 부모들은 자녀만큼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패배하지 않도록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자녀를 키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부모가 어린 자녀 명의의 주식 계좌를 만들고 몇몇 종목을 선택해 불리도록 가르치는 가정은 이제 드물지 않다. 국영수 학원을 보내는 대신 학원비를 모아 자녀가 성인이 됐을 때 창업자금을 대주겠다고 결심하는 부모도 눈에 띈다. 특히 금융인 존 리(메리츠자산운용 대표) 등을 비롯해 “사교육 대신 주식을 사주라”고 강조하는 유명 투자자들이 늘면서 그 영향이 평범한 부모들의 자녀교육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픽 노수민 기자 bluedahlia@hani.co.kr
가족생활을 영상으로 올리고 있는 유튜버 ‘보미아빠’(하동현·40)는 지난 3월 첫 생일을 맞은 딸을 위해 주식 계좌를 터줬다. 돌잔치 겸 모인 친지들과 한 식사 자리에서 할아버지, 고모, 이모들이 준 돈 300만원이 생겼는데, 그냥 써버리기엔 아까웠다. 하씨는 딸의 가족관계증명서와 기본증명서 등을 들고 직접 증권사 영업점에 방문해 딸 명의의 계좌를 만들었다. 아빠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주식 세 종목을 골라 100만원어치씩 샀다. 한 종목은 삼성전자, 나머지 두 종목은 아이가 살아갈 미래에 더 유망할 것으로 보이는 환경주와 엔터주를 골랐다. 하씨는 “현금을 그냥 두면 써버릴 게 뻔하고 은행에 넣어두면 금리가 낮아 의미가 없을 것 같다”며 “수익이 발생하면 팔고 새 주식을 사면서 딸의 자산을 늘려갈 생각”이라고 했다. ‘신세대’ 부모들은 자녀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필수적 능력을 심어주려 가정에서부터 각개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새다. 예능프로그램 <온앤오프>(티브이엔·tvN)에 출연한 가수 김윤아(47)씨는 14살 자녀에게 스스로 용돈을 벌게 하는 시스템을 가정에 구축했다. 설거지 3000원, 강아지 산책 2000원 등 가사노동이나 반려견 돌봄을 할 때 일종의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녀는 하루 최대 1만2500원까지 용돈을 벌 수 있다. 부모는 자녀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새로운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자”며 임금협상도 벌인다. 김씨는 방송에서 올바른 경제관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피력했다. 이 방식은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들 사이에 이슈가 됐다. 고교생 자녀를 키우는 50대 직장인 권아무개씨는 “나쁘지 않은 방식이다. 우리 아이도 의욕만 있다면 그렇게 기르고 싶다”고 말했다. 권씨는 “이제 10대 후반인 아이가 10~20년 뒤 결혼을 할 텐데 그때 내가 집값을 보태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부모로서 아이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 고민된다. 내가 결혼할 때와 달리 우리 자녀 때는 저축으로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데, 부모인 내가 뭐라도 해주고 싶지만 여건이 안 되니까 경제관념이라도 제대로 교육시키고 싶다”고 했다.
예능 프로그램 <온앤오프>(티브이엔)에 출연한 가수 김윤아씨 가족이 임금협상을 하는 모습. 프로그램 화면 갈무리
부모들의 이런 불안 심리를 반영하듯 서점가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경제교육 동화’, ‘처음 만나는 금융 동화’ 같은 문구를 내건 어린이용 경제·금융서들이 즐비하다. 올해에만 <아홉살 돈 습관 사전 세트: 생활편+학습편―초등 어린이가 꼭 알아야 할 54가지 돈 이야기>(다산에듀), <어린이 첫 투자 수업>(주니어김영사), <장난감 말고 주식 사 주세요!: 어린이를 위한 착하고 바른 투자>(우리학교) 등이 나왔다. 책뿐 아니라 놀이를 통해 경제와 금융을 배우도록 하는 보드게임 등 자료와 교구들도 다양하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아무것도 모르고 성인이 되어 월급을 받은 뒤 무지한 상태로 위험하게 투자하는 것보다 청소년기에 투자의 양면성을 알게 해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과거엔 주식이 도박인 것처럼 가르쳤지만, 그렇게 주식이 나쁘다는 관념만 심어준다면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건전한 주식시장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부 교사·부모가 개인적인 커리큘럼으로 가르칠 게 아니라 공교육에서 검증된 과정으로 제대로 금융교육을 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했다. 김 대표는 “유럽 국가들은 아이들에게 일찌감치 시장경제를 알려주고 교실에서 모의 단체교섭도 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지만, 우리에게 지금껏 그런 교육이 없다 보니 성인이 됐을 때 알바를 해도 임금을 떼이고 주휴수당이 뭔지도 모르게 아이들을 길렀다”며 “이제는 합리적으로 접근할 때”라고 말했다.
상당수 부모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경제 흐름 속에서 자녀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고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2살, 6살 자녀를 기르는 30대 직장인 김가영(가명)씨는 첫아이가 갓난아기였던 5년 전만 해도 엄마들 사이에 아기 이름의 은행 계좌 만들기가 유행이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그땐 아들 계좌에 ‘사랑해’ 1만원, ‘너의 세뱃돈이야’ 10만원, 이런 식으로 엄마가 저축해주는 붐이 있었다. 애가 세살 때까지 해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자도 붙지 않고 이걸 왜 했나 싶다. 현명한 엄마들은 그때 주식을 사줬을 것”이라며 뒤처지는 듯한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다. 김씨는 “지금 아이들의 주식 계좌를 안 만들면 나중에 아이에게 미안해질 것만 같다. 그런데 막상 주식 계좌를 만들어서 자산을 불려주려니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고 투자한 종목이 오르내리면 스트레스가 쌓여 쉽지가 않다”고 했다.
금융감독원이 만든 어린이 보드게임 ‘모을까? 불릴까? 금융탐험대’ 놀이.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개인의 자산 증식만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정답인 듯 이야기하고, 의사결정만 잘하면 개인의 노력에 따라 누구나 부의 증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구조적 문제를 볼 수 없게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영섭 ‘세상을 바꾸는 금융연구소’ 소장은 “자산시장의 극심한 불균형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각자 생존전략을 펴는 것인데, 자산 폭등 시대에 지금 아동·청소년기 자녀를 기르는 부모 세대가 희망을 찾지 못하다 보니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개인이 자산 증식을 통해 알아서 각자 살아남으라는 생존경쟁 명령이 젊은 부모 세대에게 강요되고 있다”고 풀이했다. 한 소장은 “아동·청소년기에 시장경제의 순기능만 배울 경우 성인이 됐을 때 빈곤이나 불평등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를 자산을 쌓지 못한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보게 될 위험성이 있다.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자본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인식하도록 하고, 시장경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역할도 함께 이야기하며 균형 있는 관점을 갖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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