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남북탁구단일팀 코리아
(2) 마침내 단일팀으로
27년 만에 ‘남북탁구단일팀’ 결성
판문점 만남 뒤 참가국 전원 찬성
“스포츠를 통한 평화 증명된 순간”
함께 훈련 하루 한두 시간 불과
한국의 안재형 북한의 김진명 감독
선수선발 첫 기준 ‘무조건 이길 것’
두번째는 ‘하나의 의미로 이길 것’
27년 만의 단일팀 마음은 하나였다
2018년 5월3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남북 여자 탁구선수들이 스웨덴 할름스타드에서 단체전 단일팀을 구성하기로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한탁구협회 제공, 연합뉴스
“당의 승인이 떨어졌소!” 북한탁구협회 주정철 서기장의 한마디에 유승민 위원과 대한탁구협회 박창익 전무, 심재구 사무처장은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역사적인 사건 앞에 뭐라고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 밀려왔어요. 그저 뭉클했죠.” 박창익 전무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 자리에 있던 실무진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길고 길었던 그들의 밤은 역사적인 결실을 보게 됐고, 실무진의 가슴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훗날 27년 만의 남북 탁구 단일팀이 역사에 기록된다면 그저 뒷단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노력이었지만, 그 순간 어떤 마음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들 자신만큼은 기억할 수 있었다. “일단 9부 능선은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양국의 승인인데 거의 비슷한 시간에 승인이 났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뿌듯했어요.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드는 것, 스포츠를 통한 화합과 결속, 평화 이런 것들이 증명되는 순간, 스포츠인으로서 뿌듯했습니다.” 유승민 위원은 말했다.
토마스 바이케르트 국제탁구연맹(ITTF) 회장 역시 약속대로 남북 단일팀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전원 찬성이었다. 2018년 4월27일 남북 두 정상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만난 후 세계 구석구석 남북 평화를 응원하는 국제 여론이 퍼져 있었고, 국제탁구연맹 쪽이 회원국을 설득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우리는 남북이 한 팀으로 경기를 뛸 수 있도록 준결승에 관련된 국가들을 설득했습니다. 사실 준결승 관련 국가들 모두가 남북 단일팀 아이디어에 매혹됐죠. 그들을 설득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그들 모두가 긍정적이었거든요.” 바이케르트 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나라별로 입장 차는 있었지만 남북 단일팀에 특히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국가는 일본이었다. 만약 남북 단일팀이 결성돼 4강에 진출할 경우 단일팀은 일본과 맞붙게 돼 있었다. 그 경우 응원은 상대팀인 남북 단일팀에 집중될 것이고, 남북 선수 모두의 엔트리가 보장돼야 하는 상황에 한국과 북한의 에이스들이 한 팀이 돼 전력이 강화될 게 뻔했다. 그렇다고 평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남북 단일팀에 대해 다른 국가들이 찬성표를 던지는 마당에 일본이 혼자 반대한다고 나선다면 그 역시 비난의 화살이 꽂힐 게 뻔했다. 일본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사실 일본의 지지가 없었다면 남북 단일팀 프로젝트는 추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본에 정말 감사한 일이죠. 일본은 남북 단일팀에 반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국제탁구연맹이 추진하려고 했던 스포츠를 통한 세계 평화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단, 일본은 단일팀 성사에 따라 그들이 치를 경기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는 고민했습니다.” 바이케르트 회장은 말했다. 2018년 5월3일 아침 경기 당일. “우리 오늘 북한하고 경기,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스웨덴 할름스타드 시합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도 선수들은 여전히 단일팀 성사 여부를 알 수 없었다. 전날 밤 유승민 위원이 훈련장을 찾아와 남북 단일팀 결성에 대한 선수 동의를 받고 훈련장을 나간 뒤로 선수들 중 누구도 단일팀 추진 상황을 전달받지 못했다. 한국 여자 선수들은 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단체경기에서 좋은 경기 흐름을 보였고, 예선 전승으로 8강에 진출한 상태였다. 선수들 입장에선 남북 단일팀이 성사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의 끈을 놓쳐선 안 됐다. 그것이 실무진이 전략적으로 단일팀 추진 과정을 선수들과 공유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전날까지 남북 단일팀 추진 상황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선수들이 동요할까 봐. 그리고 당일 오전 9시에 감독에게 선수들에게 통보하라고 했죠.” 박창익 전무는 설명했다.
오전 10시. 한국의 서효원, 전지희, 양하은 선수가 경기장에 입장했다. 이어 북한의 차효심, 김송이, 김남해 선수도 경기장에 입장했다. 한국과 북한 선수는 서로 각자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관중석에 앉아 있는 어느 누구도 이들이 경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경기 중계자는 흥분된 목소리로 남북 단일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방금 국제탁구연맹 쪽으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한국과 북한 팀은 서로 경기를 하지 않고, 한 팀을 결성해 경기에 출전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코리아팀으로요! 저스트 코리아(Just Korea)!” 중계자의 설명과 함께 경기장에는 남북 단일팀으로 이름을 올린 한국과 북한의 총 9명의 선수와 2명의 감독이 입장해 심판과 차례차례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남북 선수가 뒤섞여 나란히 서서 관중석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던 관중도 남북 단일팀 선수를 향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남북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인들의 박수였고, 경기장에 있는 누구 하나도 그 분위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2018년 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의 주인공으로 선 선수나 감독의 입장에서도 기분이 묘하긴 마찬가지였다.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유은총 선수의 마음속엔 뭔가 뭉클한 게 올라왔다. ‘우리가 이제 한 팀이구나.’ “북한은 그동안은 항상 적으로 만났었죠. 같은 말을 쓰기는 하지만 섞일 수 없는 선수들이었어요. 그런데 단일팀이 되면서 기분이 묘했습니다. 단일팀 주인공들 안에 있다는 게 행복하고 뜻깊었죠.” 유은총 선수는 말했다. 그리고 관중석에서 남북 단일팀이 성사된 현장을 지켜보며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사람이 있었다. 바로 27년 전인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의 주역이었던 현정화 감독이었다. ‘사람들이 91년 지바에서 나를 바라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단일팀 선수들이 뒤섞여 일렬로 서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현정화 감독은 생각했다. 현정화 감독이 남북 단일팀에서 선수로 뛴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이미 27년이 지난 이야기였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23살의 앳된 선수는 50살 중년의 나이가 돼 있었다. 이제 현정화는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으로 탁구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대한탁구협회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2020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그리고 또 한편으론 이번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선수들 중 한명이었던 서효원 선수의 스승으로서 스웨덴을 찾았다. “스웨덴에서 남북 단일팀의 남북 선수들이 같이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바로 뒤 관중석에서 봤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옛날 제 모습이 오버랩되더라고요. ‘내가 27년 전에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그런 생각에 감성에 젖었습니다.” 현정화 감독은 당시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스승인 현정화 감독에게 단일팀 바통을 이어받은 서효원 선수.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단일팀 역시 세대교체를 통해 새 시대의 변화에 알림창이 켜졌다.
2018년 5월4일 스웨덴 할름스타드 아레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 경기에서 여자 탁구 남북 단일팀의 안재형 한국 감독(왼쪽)과 북한의 김진명 감독이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남북 단일팀이 결성됐지만, 한국과 북한 선수가 한 팀으로 합동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부족했다. 5월3일 8강에서 한국과 북한이 서로 맞붙지 않고 한 팀으로 4강에 출전하겠다고 선언한 뒤, 당장 다음날인 5월4일 남북 단일팀은 일본과 4강전을 치러야 했다. 한국과 북한 단일팀 선수가 함께 훈련한 시간은 경기가 없어진 5월3일 오후 2시간, 5월4일 일본과 시합하기 전 1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남북 탁구 단일팀이 짧은 훈련 기간을 거치고도 경기에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탁구라는 스포츠의 특수성도 있었다. 탁구는 축구나 농구 등과 같이 팀워크가 중요한 스포츠 종목과 다르게 선수 개인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농구나 아이스하키 등과 같은 종목은 한 팀을 이룬 선수들이 손발이 잘 맞아야 합니다. 팀원 간의 작전과 지시가 있어야 하죠. 그런데 탁구는 달라요. 탁구는 결국 개인 기술이에요. 팀워크도 중요하지만 개인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탁구 종목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세계적 수준에 있고, 북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북한과 한국이 단일팀을 갑자기 만들어도 개인 역량으로 충분히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이 있죠.” 현정화 감독은 설명했다. 북한 여자 탁구의 경우 세계랭킹에선 많이 밀려 있었지만, 그것은 북한 선수들이 세계대회에 많이 나오지 않은 탓이 컸다. 실제로도 한국 선수들과 실력이 비슷했을 뿐만 아니라 다리 움직임이나 기본기 면에선 한국 선수들보다 더 뛰어났다. “탁구는 선수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나라마다 추구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사실 현재 한국 여자 탁구는 1980~1990년대 양영자, 현정화 세대보다 많이 뒤처져 있고 고유한 색깔을 잃은 게 사실입니다. 반면 북한 선수들은 우리보다 더 공격적이고, 까다로운 개성을 지니고 있죠. 나름 북한 탁구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재형 감독은 북한 탁구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 선수로서도 분명 북한 선수와 함께 뛰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북한 선수들은 기본기가 굉장히 좋습니다. 다리 움직임 같은 것들이요. 힘도 좋고 기본기가 좋아 흔들림이 적죠. 대표 선수가 아니더라도 연습만 봐도 다리 힘이 좋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양하은 선수는 북한 탁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남북 단일팀이 성사되며 국제탁구연맹 쪽은 단일팀에 유리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줬다. 그중 상대팀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엔트리였다. 북한 선수 4명, 한국 선수 5명 총 9명으로 엔트리가 늘었다. 기존 5명에서 두배가량이 늘어난 것이다. 이럴 경우 두 팀으로 나뉘었던 에이스가 한 팀이 돼 단일팀의 전력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팀이었던 일본은 다행히 단일팀 엔트리를 늘리는 부분에 동의해줬지만, 누가 경기를 뛸 것인지 미리 알려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남북 단일팀 선수 엔트리가 9명, 일본 선수 엔트리가 5명으로 일본에 불리한 조건인데 9명 중 누가 경기에 나올 것인지 모른다면 더더욱 일본에 불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감독 안재형과 북한 감독 김진명이 단일팀 선수 누구를 출전시킬지 머리를 맞댔다. “출전 선수 조합의 첫번째 기준은 무조건 이기는 거였죠. 누구를 어떻게 조합하면 이길 수 있을까. 그리고 두번째는 단일팀의 의미였습니다. 남북이 하나된 팀의 의미를 살려서 이기는 것.” 안재형 감독은 말했다. 그렇게 남북 단일팀의 출전 선수는 한국의 전지희, 양하은 선수와 북한의 김송이 선수로 결정됐다. 세대는 달라졌지만 단일팀을 느끼는 선수들의 마음은 같았다. 그렇게 27년 만에 결성된 여자 탁구 단일팀에 출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3회에 계속)
김지나 작가·<뉴스핌> 기자, 공동기획 팩트스토리
▶ 스포츠는 정치와 국경을 넘을 수 있는가. 30년 전인 1991년에 이어 2018년 또다시 남북 탁구 단일팀이 꾸려졌다. 그해 봄, 남북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직후였다. 30년 전 단일팀 선수들은 감독과 스승이 되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남북관계가 안개에 싸인 지금, 새 시대를 열었던 단일팀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본다. 이 기획은 영화사 명필름과 팩트스토리가 함께 했고, 명필름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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