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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한 스푼 끼얹은 할리퀸 로맨스 ‘브리저튼’···8200만 사로잡은 이유 - 경향신문

2021.02.11 12:00 입력 2021.02.11 1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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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제공

※기사 내용 중 <브리저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페미니즘 한 스푼, 인종다양성 두 스푼을 끼얹은 할리퀸 로맨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브리저튼>을 보고 드는 생각이다. 19세기 영국 리젠시 시대(1811~1820)를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물 <브리저튼>은 넷플릭스 역대 시청 기록 1위를 갈아치웠다. 공개 후 28일간 8200만 계정이 시청해 기존 1위였던 <위처> 7600만을 제쳤다. 벌써 시즌2 제작도 확정됐다. 남녀 주인공의 ‘밀당’을 소재로 한 다소 ‘뻔한’ 로맨스물 <브리저튼>이 대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특별한 요소를 찾아봤다.

■줄리아 퀸×숀다 라임스 사단의 ‘예견된 성공’

<브리저튼>은 대중성이 검증된 원작소설에 스타 제작자가 더해진, 그야말로 ‘핫’한 드라마다. 하버드대 출신 미국 작가 줄리아 퀸의 로맨스 소설 <공작의 여인>은 29개국에 번역·출간된 베스트셀러이다. 게다가 인기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등을 제작한 숀다 라임스가 넷플릭스로 옮긴 후 선보인 첫 작품이다. <브리저튼>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잘생긴 외모에 근육질 몸매까지 멋진 헤이스팅스 공작과 청초하고 아름다워 ‘사교계의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다프네를 보는 재미가 있고, 이들의 계약연애와 ‘밀당’은 로맨스물의 뻔한 장치임에도 연신 ‘다음회 보기’를 누르게 만든다.

화려한 의상과 미술 또한 그 자체로 볼거리다. 8개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10번의 무도회를 위해 의상만 7500벌을 제작했다. 영국의 아름다운 정원과 풍경, 무도회장의 화려한 장식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헤이스팅스 공작과 다프네가 선보이는 러브신도 ‘핫’하다. ‘29금’이라 불릴 정도로 수위가 높다. 시청자들의 인기에 넷플릭스는 ‘엄빠주의’ 안내서도 만들었다. 부모님과 함께 볼 때 ‘주의할 장면’들을 안내한 것이다. 물론 혼자 있을 때 골라보란 얘기겠지만….

물론 이 정도는 다른 로맨스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브리저튼>의 특별함은 다소 뻔한 로맨스물에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를 더한 데서 온다.

우선 흑인 남주인공부터 파격적이다. 영국의 흑인 공작이라니! 생소한 설정이지만 ‘퓨전 사극’이기에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남주인공 레제 장 페이지는 <브리저튼>을 통해 ‘핫가이’로 급부상하며 <브리저튼> 인기에 한몫했다.

인종적 다양성에 더해 극 중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도 등장한다.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당시 가부장적 귀족 사회의 모순과 성차별을 지적하며, 제작진은 ‘미투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21세기에도 먹힐 법한 로맨스물을 만들어냈다.

페미니즘 한 스푼 끼얹은 할리퀸 로맨스 ‘브리저튼’···8200만 사로잡은 이유

■불쌍한 다프네, 성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브리저튼>을 보며 가장 안타까워지는 것은 귀족들이 귀한 딸들의 ‘순수’를 지킨다며 결혼할 때까지 성에 대한 지식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부분이다.

딸들은 남편감을 찾기 위해 사교계에 진출하고 청혼을 받으면서도 성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결혼하면 아이가 저절로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던 어린 소녀들은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한 여성을 보며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 궁금해하지만, 부모들은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반면에 남자 형제들은 은밀히 귀족이 아닌 다른 계급의 여성과 사랑을 나누며 여자 형제들의 질문에 낄낄댄다.

다프네 역시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 물어보지만, 공작은 “어째서 부모들이 딸들을 무지 속에 방치하는지”라고 말할 뿐이다.

계약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공작 부부에게 찾아온 ‘두 번째 위기’ 역시 성에 대한 무지와 관계가 있다. 다프네는 결혼 후 어머니를 향해 “나를 왜 성에 대해 백치인 상태로 결혼하게 만들었냐”고 항의한다.

무슨 얘기냐고? 공작은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로 아이를 절대 갖고 싶지 않아 하고, 다프네의 꿈은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공작은 ‘피임’을 한다며 질외사정을 고집하고,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도 모르고 결혼한 다프네는 공작이 하는 행위가 뭔지도 모른다. 뒤늦게 공작의 행동의 의미를 알게된 다프네는 배신감에 격분하고, 둘은 별거 직전까지 간다.

이 무슨 쓸 데 없는 싸움과 갈등인가 싶지만, 높은 수위의 노출신으로 화제가 된 5·6회를 보다보면 저절로 이마를 짚게 된다. 질외사정은 성교육의 부재로 자리잡은 ‘잘못된 피임법’의 대표적 예다. 다프네가 성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큰 싸움과 갈등을 겪지 않고도 아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공작에 대한 배신감은 다른 차원이겠지만….

<브리저튼>은 어찌보면 잘못된 성교육의 폐해를 다루며 ‘조기 성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드라마 같기도 하다. 지난해 한국에서 여성가족부가 벌인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에서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설명한 그림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이 ‘조기 성애화’를 부추긴다며 논란이 돼 회수조치된 일이 있었다. 성교육을 아직도 금기시하고 성에 대한 지식을 숨겨야할 것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가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다프네의 대척점에 있는 둘째 딸 엘로이즈(왼쪽)는 결혼과 출산으로 제한된 여성의 역할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길 원한다. 넷플릭스 제공

다프네의 대척점에 있는 둘째 딸 엘로이즈(왼쪽)는 결혼과 출산으로 제한된 여성의 역할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길 원한다. 넷플릭스 제공

■페미니즘 한 스푼 ‘살짝’

옛날 여고생들이 친구들과 몰래 돌려보던 할리퀸 로맨스 소설엔 공작과 같은 ‘나쁜 남자’가 종종 등장했다. 돌이켜 보면 거의 성폭행에 가까운 관계를 로맨스로 포장한 소설들도 있었다. 물론 21세기 ‘할리퀸 로맨스’ <브리저튼>은 그 정도로 막 나가진 않는다.

주인공 다프네는 성공적인 결혼과 출산을 꿈꾸는 ‘전통적인 귀족 여성상’을 대표한다. 하지만 다프네의 보수적이고 전형적 캐릭터에도 약간의 변주는 있다. 다프네는 구혼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존 할리퀸 로맨스처럼 멋진 남자가 구해주길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주먹을 날린다. 결혼과 출산을 인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에 충실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는 여성이다. 자신에게 구애하는 프러시아 왕자 대신 공작을 선택하며, 공작을 향한 자신의 사랑도 솔직하게 표현한다.

다프네가 전형적 여주인공을 변주했다면 둘째 딸 엘로이즈는 ‘페미니스트 역할’이다. 엘로이즈는 다프네의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로 강요된 여성성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 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교육의 제약, 결혼에 대한 강요 등을 강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꿈을 좇고 싶어한다. “예쁜 건 성취가 아니잖아. 노력으로 얻은 게 아니잖아. 난 더 많은 것을 성취할 능력이 있어” 라며 결혼과 출산으로 제한된 여성의 삶에 의문을 제기한다. 피아노를 치고 자수를 배우는 대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사교계에 진출해 남자를 찾는 대신, 사교계 스캔들을 글로 써서 배포하는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뒤를 쫓는다.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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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적 다양성은 ‘듬뿍’

<브리저튼>에서 가장 눈에 띠는 혁신성은 인종적 다양성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파란 눈’의 백인이었던 공작 역할에 흑인 배우 레제 장 페이지를 캐스팅해 화제가 됐다.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캐스팅은 조지 3세의 부인 샬럿 왕비 역의 영국 배우 골다 로슈벨이다. ‘흑인 배우’가 여왕으로 출연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실제 샬럿 왕비는 영국 왕실 조상 중에 흑인 혼혈이 있을 것이란 주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샬럿 왕비의 ‘흑인 혼혈설’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

이 밖에도 흑인, 히스패닉,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의 배우가 자연스럽게 사교계와 무도회장을 누비면서 ‘블랙 워싱’ 논란이 일기도 했다. 블랙 워싱은 할리우드 등 서양 주류 영화계에서 무조건 백인 배우를 기용하는 관행인 ‘화이트 워싱’에 견줘 나온 말이다.

<브리저튼>에서는 흑인 여왕과 흑인 귀족이 가능한 이유를 ‘사랑’으로 설명한다. 조지 3세가 흑인 여왕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서 유색인종에게도 귀족 지위를 부여했고, 이 때문에 헤이스팅스 공작 가문도 탄생했다.

<브리저튼> 캐스팅의 파격은 오히려 흥행 요인이 됐다. 공작 역할의 레제 장 페이지는 여성 시청자를 사로잡으며 스타로 떠올라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다. 원작 소설을 쓴 줄리아 퀸도 다인종 캐스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줄리아 퀸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더해 <브리저튼>이 현실 세계와 비슷해졌으며 ‘세상이 이렇게 돼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줄 수도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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