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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물 묻힌 투사 백기완, 막내딸 업고 저녁밥 짓던 일상 - 한겨레

[한겨레21]
작가 공지영, 어릴 적부터 지켜본 백기완 선생 영전에 부쳐
창경궁, 늙고 마른 백기완, “이 발길로 고향 어머니 무덤에 한번 가보고 싶어...” 사진 채원희
창경궁, 늙고 마른 백기완, “이 발길로 고향 어머니 무덤에 한번 가보고 싶어...” 사진 채원희
고문당하고 81㎏ 몸이 38㎏ 되도록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는 비굴하지도 상처에 찌들어 비뚤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으니 너희가 나를 대접해야 한다, 라는 역겨운 가식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동지였고 그런 대우를 받았다.
한 인간을 추억한다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다 살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열 권의 책을 쓴다 한들 그의 인생을 다 묘사해내지는 못하리라. 혹자는 그를 통일운동가로, 혹자는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정치가로 부르고, 혹자는 온갖 말로 그를 가리켜 폄하도 할 테지만, 나는 그를 말과 행함에 있어 아주 작은 괴리라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던 한 진실한 인간, ‘새내기’ ‘동아리’ 같은 말을 우리에게 새로 일깨워준 작가 혹은 시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딸들의 도시락을 챙겼던 그
그의 부고를 듣고 수많은 생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내 인생의 많은 곳에도 그가 있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그의 책부터 1987년과 1992년 대통령선거, 쌍용자동차 등 모든 해고자의 눈물 속까지. 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장소, 어떤 순간 속에 그가 있었음이 스쳐 지나갔으리라. 그는 그렇게 어디에나 있었다. 만일 거기 의로운 분노가 있고 가난한 눈물이 있었다면 말이다. 만일 거기 더러운 억압이 있고 최루탄과 짓밟힘이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건 조금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그의 큰딸인 백원담 교수(성공회대)와 학교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그의 집에 방문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어렸던 나는 그가 설거지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학교에 강사로 오면 구름떼같이 모인 학생들의 환호성에 휩싸인 주인공이던 그가, 거구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하며 10만 명 넘게 운집한 광장의 젊은이들을 움직이게 하던 그가, 두레상에 앉아 겸손한 식사를 마치며 당연하다는 듯이 그릇을 들고 설거지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평생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내의 노고를 돕기 위해, 그는 언제나 막내딸을 둘러업고 저녁밥을 하고 내일 가져갈 딸들의 도시락을 챙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가 보고 싶은 딸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런 아빠였다. 그 집안에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례 같았다. 이른바 ‘민주화 투사’라는 사람들이 여자 문제를 일으키던 때, 나랏일은 남자의 것이고 집안일은 여자나 하던 것이라는 봉건이 아직도 짙었던 그때, 페미니즘에 겨우 눈뜨던 내게 그 모습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더구나 그는 이미 그 직전인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의 개들에게 끌려가 고문당하고 81㎏의 몸이 38㎏ 되도록 만신창이가 되어, 던져지듯 집으로 돌아와 겨우 회복한 터였다. 모두 가망이 없다는 죽음의 세월에서 그는 다시 살아났으나 이후에도 투옥과 고문, 가택연금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도 상처에 찌들어 비뚤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으니 너희가 나를 대접해야 한다, 라는 역겨운 가식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동지였고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가 한 번도 그녀를 배반한 일이 없다는 당연한 일이 역사에서 얼마나 드문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1992년 겨울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민중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나섰을 때, 그의 대선 캠프에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나는 1500㏄ 소형차를 그 캠프에 줬고 그는 그것을 전용차로 썼다. 당시 이름 없던 소설가가 가진 차를 차출해 전용차로 써야 할 만큼 가난한 대선 캠프. 몇 년 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소형차를 타는 것을 보고 감동받은 사람들이 그랬듯, 당시 내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신선한 충격이 얼마나 많은 청년의 정수리에 희망을 들이부었던지. 변두리 집에서 나는 자동차를 빌려주고 발이 묶여 하는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썼으니 그게 거의 30년 전 일이다. 세월은 덧없이 날아가고 우리네 인생은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만큼 허망하게 스러지는 듯하다. 
모든 가여운 이들을 위해 애썼던 그
꽃이 질 때마다 울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러나 그 꽃 아래서 우리가 했던 약속을 기억하는 건 좋은 일이리라. 그 꽃 아래서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고 하늘을 우러르던 빛나는 눈동자를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오, 신이시여 부디 고단했던 그의 영혼을 안아주소서. 축구화를 사고 싶어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왔던 어린 소년이 그날로 막힌 삼팔선 때문에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음을 기억하소서. 그 상처의 힘으로 다른 모든 가여운 이들을 위해 애썼음을 헤아려주소서. 그는 가고, 남은 우리는 여기서 그가 남긴 노래를 천천히 부르겠나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공지영 소설가 *백기완 선생이 1980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으면서 쓴 시 ‘묏비나리’에 나오는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의 구절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에 차용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금도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노래로 집회 현장에서 널리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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