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박태석님께 올리는 아들의 사부곡
1954년 대구 수성못에서 찍은 부친 박태석씨의 젊은 날 모습. 박효삼 주주통신원 제공
황해도 벽성군 대거면 출신 실향민
한국전쟁때 홀로 내려와 대구 정착
작은 시계방 하며 3남1녀 뒷바라지
은퇴뒤 교회잡지에 시도 종종 발표
평생 고향 그리워하다 30년 전 별세 얼마 전 인감도장을 찾다가 장롱 깊숙이 넣어둔 예물시계를 발견했다. 결혼할 때 아내가 사 준 시계다. 그동안 찬 적이 없어 거의 새것인데 이제는 내 손목이 굵어져 시겟줄이 좀 짧았다. 대구 교동 귀금속거리에 가서 시곗줄을 늘렸다. 어린 시절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아버지는 이 근처 교동시장에서 강화도 교동 대룡시장 시계방보다 좀 작은 시계방을 하셨다. 겨울에는 연탄 1장이 들어가는 화덕을 들고 출근하셨다. 퇴근하실 때는 빈 화덕을 들고 오셨는데 가끔씩 센베이, 군고구마 같은 군주전부리도 같이 들고 오셨다. 아마도 수입이 좀 좋은 날이었나 보다. 아버지 시계방을 비롯한 교동시장 전체가 나의 놀이터였고 심부름 다니던 곳이었다. 난 아버지가 손님들 시계를 고치고 분해 청소하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조그마한 나사를 풀어 분해한 뒤 다시 조립하시는 것이 늘 신기했다. 아버지는 늘어나는 시계줄로 시계 없는 팔찌를 만들어 내 작은 손목에 채워주신 적도 있었다. 수리한 예물시계를 손목에 차는데 그 옛날 아버지의 시계방이 생각났다.
부친 박태석님이 대구에서 시계방을 하던 시절 썼던 시계 수리 공구들. 박효삼 주주통신원 제공
아버지는 1918년 황해도 벽성군 대거면에서 태어나셨다. 한국전쟁 때 홀로 피난 내려와 대구 교동시장에 정착하셨다. 교동시장에는 평안도, 황해도에서 피난오신 분들이 많았다. 고향이 같은 실향민들이 모여 도민회, 군민회를 열었다. 주로 수성못, 동촌, 앞산 계곡 같은 근교 유원지에서 모였다. 가족들도 모두 같이 가서 커다란 솥에 닭백숙을 끓여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한 귀퉁이가 찢어진 낡은 아버지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수성못에서 찍은 것이다. 지난 2007년 대학에 합격한 아들과 함께 수성못 아버지가 서 계셨던 자리를 찾아가 보았다. 비슷한 장소를 찾아 사진도 찍었다. 요즘도 대구에 있을 때는 아침에 꼭 수성못을 한 바퀴 돈다. 아버지가 기대 선 소나무 근처에 가면 저절로 발걸음이 늦추어진다.
1968년 부모님과 3남1녀 함께한 가족 사진, 앞줄 오른쪽이 8살 무렵의 필자. 박효삼 주주통신원 제공
1985년 부친 박태석(왼쪽)님의 노인대학 졸업식 때 필자(오른쪽)와 찍은 기념사진. 박효삼 주주통신원 제공
우리 가족은 명절이면 늘 만둣국을 끓여 먹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고향 레시피로 만들어 주셨다. 홍두깨로 넓게 민 밀가루 반죽을 주전자 뚜껑으로 눌러 동그란 만두피를 만들었다. 난 만두를 아주 좋아한다. 지난 1979년 봉천동 지하차고에서 큰 형과 자취할 때다. 슈퍼에서 만두피를 파는 걸 처음 보고 사다가 만두를 만든 적이 있다. 두부·김치·당면·갈은 돼지고기·숙주나물 등으로 속을 넣어 빚었는데 아무리 만들어도 속이 줄지 않았다. 공장에서 찍어낸 만두피는 크기가 너무 작았다. 그 날 친구들을 모두 불러 만두잔치를 했었다. 아내는 아직도 명절이면 맛있는 아버지 고향 만두를 만들어 준다. 나는 아버지의 43번째 생일날 태어났다. 어머니가 생일상을 차려낸 뒤 날 낳았다고 했다. 해서 난 늘 아버지랑 생일을 같이 치렀다. 그런데 큰 형이 공무원 발령을 받은 뒤로 아버지는 ‘이제 생일을 양력으로 하시겠다’고 쿨~~하게 선언하셨다. 아버지 양력 생일은 1월 1일이었다. 내 생일도 졸지에 1월 1일이 되어버렸다. 한참을 그리 보내다 장가간 뒤에야 내 본래 생일을 찾았다. 대구 신천동 언덕 위에 있던 영신중학교를 다닐 때다. 다리에 깁스를 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자전거 뒷자리에 날 태우고 그 언덕을 매일 오르내리셨다. 다리가 불편한 큰형도 중·고교를 자전거로 손수 통학시키셨다.
부친이 별세하기 1년 전인 1991년 찍은 가족사진, 뒷줄 맨왼쪽이 필자 부부다. 박효삼 주주통신원 제공
은퇴한 뒤 아버지는 교회잡지 벧엘>에 글을 자주 기고하셨다. 주로 시를 쓰셨다. 가족 이야기, 고향 생각 등 일상생활을 담담히 시로 표현하셨다. 얼마 전 책들을 정리하다 아버지의 글들을 찾아 읽었다. 이렇게 글을 남겨주신 게 너무 감사했다. 아버지는 가끔씩 고향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끝내 고향땅을 가보지 못한 채 지난 1992년 76살 일기로 돌아가셨다. 그 날 서울 살던 나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과속으로 달렸다. 결국 임종하지 못하고 병풍 뒤에 계신 아버지를 뵈었다. 추석 전에 아버지 산소를 한 번 찾아야겠다. /박효삼 주주통신원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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