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방문하고 북 대사관에 갔다 왔으면 뭐가 있는 것 아니냐는 주변 눈초리가 가장 힘들었어요. 이제 누명을 벗었으니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아야죠.” 지난 7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난 구미간첩단 사건의 조작 피해자인 김성만(왼쪽), 양동화씨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 수감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대검찰청 1987.2.6
제목 사형집행구신
아래 사람에 대하여 사형집행명령을 받고자 소송기록을 첨부하여 구신합니다.
성명 김성만 (하략)”
1987년 2월6일자로 당시 김성기 법무부 장관의 서명까지 이뤄졌던 김성만씨에 대한 ‘사형집행구신’장. 결재 뒤 계획이 취소돼 장관 결재란에는 흰 종이가 덮여 있다. 양동화씨에 대한 동일한 문서도 이번에 처음 발견됐다. 김성만 제공
‘구신’이란 상세한 보고를 뜻하는 법률 용어로, ‘사형집행구신’은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에게 사형 집행을 요청하는 문서다. 법무부 장관이 이 서류에 결재하면 사형집행 명령서 발부 등 후속 절차가 자동적으로 뒤따르게 되고, 해당 인물은 5일 이내에 처형된다. 1987년 2월6일의 이 문서는 장관 서명까지 끝났지만, 막판에 작동이 멈췄다. 그 흔적이 문서에 고스란히 남았다. 얼핏 공란으로 보이는 장관의 결재 칸 바깥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서명이 그것이다. 당시 장관(김성기)은 사형 집행을 허락한 뒤 어떤 이유에서인가 취소했으며, 이에 따라 누군가 장관 결재란에 흰 종이를 덧댔다. 덕분에 문서의 주인공인 김성만(64)은 살아남았다. 동료 사형수였던 양동화(63)도 같은 날 사형집행구신장이 완성됐으나 동일한 과정을 거쳐 목숨을 건졌다. 주요 결재권자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우리를 정말로 죽이려고 했었구나 하는 것을 얼마 전에야 처음 알았어요. 햐! 죽음이 코앞까지 왔다 간 거죠. 사형집행구신장을 본 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김성만) “문서를 발견한 날 둘이 통화하면서 울었어요.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 사람들처럼 우리도 억울하게 바로 이 장소에서 불귀의 몸이 될 뻔했잖아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섬뜩해요.”(양동화) (*1975년 4월9일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가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을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시켰다. 이에 대해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지난 7월 대법원에서 재심 무죄를 받은 구미간첩단 사건의 조작 피해자인 김성만(오른쪽), 양동화씨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구미간첩단 사건의 사형수였던 양동화(오른쪽), 김성만씨는 1987년 2월 사형집행을 위한 문서(사형집행구신)에 법무부 장관이 서명까지 마쳤던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지난달 2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있는 옛 사형장을 찾은 두 사람은 “그 문서를 생각하면 지금도 섬뜩하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옛 사형장 앞에서 김성만과 양동화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하늘을 쳐다봤다. 가을장마가 몰고 온 먹구름으로 하늘은 잔뜩 흐렸다. 두 사람이 자신들에 대한 사형집행 시도를 알게 된 것은 지난 7월 재심 무죄가 확정된 뒤였다. 민사소송을 준비하면서 국가기록원에 요청해 받은 서류 더미에서 사형집행구신장을 발견했다. “1987년 2월이면 민주화운동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였죠.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진 사실이 밝혀져서 민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잖아요. 우리를 사형시킨 뒤 대대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민주화운동에 찬물을 끼얹으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양동화) “그런데 딱 제동이 걸린 거죠. 그렇게 제동을 걸 수 있는 힘은 당시 미국밖에 없었어요. 실제로 그때 국무부와 주한 미 대사관, 폴 사이먼 상원의원 등 미국 행정부와 의회에서는 우리를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서한을 전두환 정권에 계속해서 보냈거든요. 그때마다 우리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도 자신들이 보낸 편지 사본을 보내주고, 한국 정부의 반응도 알려줬어요.”(김성만) 앰네스티인터내셔널 등 국제사회는 관련자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등 사건 초기부터 구명운동을 벌였다. 앰네스티는 1991년 창립 30주년 때 전세계 양심수 30명에 김성만을 포함시키고, 30주년 기념 영화(<잊지 말자>,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 등)에 김성만의 이야기를 담기도 했다. 미국의 움직임은 앰네스티의 이러한 노력과 긴밀히 연계돼 있었다.
1985년 9월9일 안기부와 군 보안사령부가 조작 발표한 구미간첩단 사건을 보도한 <경향신문> 1면 지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양동화, 김성만은 1985년 9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구미(歐美)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수괴’였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와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는 미국 웨스턴일리노이대학(WIU) 유학생이었던 김성만과 양동화, 황대권, 이창신 등 4명을 간첩, 이들의 친구나 대학 동창, 후배 등 17명을 간첩단의 조직원이라고 발표했다. 구미 유학생 간첩단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또 다른 간첩 조직이라고 함께 발표된 안상근(1985년 11월 구치소에서 사망) 등 서독 유학생 2명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1986년 9월 대법원에서 김성만과 양동화는 사형, 황대권과 강용주는 무기징역 등 모두 1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김성만과 양동화는 198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13년 만에 출소했다. 두 사람은 2017년 9월 황대권(66), 이원중(58)과 함께 재심을 청구해 지난 7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고문받았던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재심할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저랑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간첩단으로 조작돼 고초를 겪었던 정금택 등이 재심을 준비하면서 그러는 거예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너 때문에 간첩방조죄를 뒤집어썼으니 이것을 벗겨줘야 할 것 아니냐’고요. 그 말을 듣고는 아, 내가 힘들어도 과거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겠구나 결심했죠. 재심은 역시 힘들었어요. 사건 당시 검사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데도 법정에서조차 바보처럼 네, 네 대답하는 기록을 보면서 과거의 내가 너무 불쌍해서 여러번 울기도 했어요.”(김성만) “저도 고등학교 후배인 강용주가 재심을 하겠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저나 김 박사(김성만)의 경우 간첩죄는 당연히 무죄가 나오겠지만 나머지 국가보안법 위반 사항은 유죄가 되지 않을까, 일부 무죄 일부 유죄를 굳이 확인해야 하냐는 생각에서 재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거든요.”(양동화)
구미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인 김성만(오른쪽), 양동화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옛 감방을 둘러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양동화와 김성만은 1982년 미국 일리노이주 머콤시에 있는 웨스턴일리노이대학에서 만났다. 양동화는 어학과정에 등록 중이었으며, 김성만은 대학원 정치학과 유학생이었다. 같은 시기 이 대학에는 유학생인 황대권(대학원 정치학과)과 재미동포 학생인 이창신도 있었다. 연세대 물리학과를 다닌 김성만과 서울대 농업교육과 출신 황대권은 대학 시절에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었던데다가 당시 국외에서도 전두환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기에 청년들은 가끔 만나 5·18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영상을 보는 등 조국의 현실을 놓고 울분을 토하곤 했다. 한국 사회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었던 황대권이 이듬해 뉴욕의 뉴스쿨로 학교를 옮길 때 김성만과 양동화도 각각 다른 이유로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에서 이들은 한인사회에서 신망이 높았던 서정균(2005년 사망)을 만나서 가깝게 지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자 <해외한민보> 발간인인 서정균의 집에서 이들은 가끔 북한 영화 등을 보기도 했다. 이들이 간첩으로 내몰렸던 것은 북한을 방문했거나 북한 인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양동화는 1984년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귀국하는 길에 동유럽을 거쳐 평양을 방문했다. 김성만은 1983년 6월 헝가리 북한대사관에서, 1984년 11월에는 동베를린에서 북한 인사들과 만났다. 헤어질 때 여비조로 돈을 받은 것도 간첩이라는 증거가 됐다. “군 복무를 위해 귀국할 때였어요. 서정균씨가 유럽에 들러 여행도 하고 민주인사도 만나자고 해서 유럽행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 중에 느닷없이 북한을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너무 놀라서 몇번을 거절했지만, 모질지 못한 성격 탓에 따라갔어요. 북한을 동경하는 마음은 당시에도 없었지만,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관심과 북한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거든요. 평양과 묘향산 등 일반적인 여행코스를 보여줬는데 제가 그들과 얘기하다가 정권의 부자세습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해서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적이 있는 것을 빼곤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그런 것들이 실망스럽고 해서 방북 사실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지냈어요.”(양동화)
구미간첩단 사건의 조작 피해자인 양동화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통일방안에 대해서 북한 사람들과 토론해보라는 서정균씨의 권유로 1차로 헝가리 대사관에서 만났는데 크게 실망했어요. 저에 대한 신상조사만 잔뜩 하고는 제대로 된 토론은 없었거든요. 저녁에 술을 마실 때 제가 개성의 존중을 얘기했더니 이 사람들은 입을 딱 다무는 거예요. 그중 한명이 ‘수령님이 개성이 중요하다고 얘기했다’고 하니까 다들 ‘그렇다’면서 입을 열더라고요. 북한의 체제가 인간 사고를 어떻게 옥죄는지를 겪은 거죠, 그때. 그래서 북한 사람들을 다시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이듬해 독일어 공부하러 유럽에 갔을 때 서정균씨가 이번에는 제대로 토론이 될 거라면서 강하게 권해서 따라갔죠. 처음에는 고려연방제를 놓고 토론하다가 제가 현실성이 없다고 반박했더니 얘기를 딱 접고는 노동당에 가입하라, 주체사상을 갖고 남한에서 운동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태연한 척하면서 남한에서 운동하는 사람이 왜 노동당 가입이나 주체사상을 가지면 안 되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했죠. 그런데도 계속 설득하길래 그랬죠.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이겠지만, 남한에서 김일성 주석이니 김일성 주체사상이니 얘기하면 그게 통하겠느냐’고. 그랬더니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 지르면서 방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걸로 끝이었지만, 제가 북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누군가 알면 그것도 죄가 되니까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죠.”(김성만)
구미간첩단 사건 조작 피해자인 김성만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귀국 뒤 양동화는 고향인 광주에서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했으며, 김성만은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을 계속했다. 특히 김성만은 정금택, 김창규와 함께 운동권 팸플릿인 ‘예속과 함성’을 가명으로 집필해 1984년 7월 대학가에 배포했다. 군사독재정권을 미국이 지원하고 있음을 분석한 것으로, ‘반미 자주’를 외친 최초의 운동권 문건이었다. “1985년부터 북한 방송을 듣고 전파하는 주사파가 나왔지만, ‘예속과 함성’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어요. ‘예속과 함성’에는 양키고홈도 없고, 주한미군 철수 주장도 없어요. 어디까지나 민주화운동 차원에서의 자주와 반미였죠. 그 뒤의 흐름을 보면 ‘예속과 함성’이 큰일을 했다고 봐요.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때 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던 전두환 정권의 기도를 미국이 막거든요. 청년 학생들의 반미 정서에 미국이 놀랐던 결과라고 봐요. 물론 저는 맹목적 반미주의자가 아닙니다. 안보적 차원에서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자주를 추구해야 한다고 봐요.”(김성만) 미국 머콤시에서부터 이들을 주시했던 공안당국은 두 사람의 ‘과거’를 눈치챘고, 안기부는 1985년 6월 초 양동화와 김성만을 차례로 붙잡아 갔다. 이즈음 부모님께 갓난아기를 맡기러 일시 귀국했던 황대권도 붙잡혔다. 이들은 혹독한 고문 끝에 간첩으로 만들어졌으며, 평소 가깝게 지냈던 친구와 선후배들은 간첩방조자로 조작됐다. “발바닥을 맞는 것이 죽을 만큼 아픈 줄은 처음 알았어요. 잔뜩 부풀어 오른 발바닥을 몽둥이로 평지 고르듯이 쓰다듬을 때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들이 부르는 대로 진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죠. 소명의식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조선노동당 입당 부분은 못 쓰겠다고 했더니 지독한 물고문을 했고, 끝내 정신을 잃었어요. 결국 입당했다고 허위 진술을 했지만, 검찰에 송치돼 조사받을 때 이것만은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버텼죠. 노동당 입당 부분은 그래서 기소장에서 빠졌어요.”(김성만) “무지막지한 고문은 육신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영혼마저 찢어요. 노동당 입당이든 뭐든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진술을 번복하면 다시 안기부로 잡아온다고 하고 실제로 재판정 방청석에도 안기부 사람들이 앉아 있으니까 무서워서 부인을 못 했어요. 재판을 마치고 돌아가는 호송차에서 한번은 김 박사가 저한테 ‘꿈 깨! 꿈 깨!’라고 하더군요. 노동당 입당을 하지 않았으면서 왜 법정에서 예, 예라고 답하느냐는 거죠.”(양동화)
지난 7월29일 대법원에서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김성만(왼쪽 둘째), 양동화(가운데)씨가 동료, 후원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양동화 제공
지난해 2월 재심 1심에서 구미간첩단 사건 4명 모두 무죄를 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김성만과 양동화에 대해서는 항소와 상고를 했다. 북한 방문과 북 대사관 등에서의 만남, 돈을 받은 것은 국가보안법상의 잠입 탈출, 회합 통신죄 등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2심과 3심은 북한과의 단순 접촉이나 금품 수수를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로 판단했다. 그런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이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들에게 그런 인식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2심 판결문)는 것이었다. 재심을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는 “북한을 가거나 북한 사람들을 만나 돈을 받으면 그동안에는 거의 무조건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해왔는데 이번 판결은 그런 행위들이 국가의 존립이나 안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를 따져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법적으로 확인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조작된 것이지만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가 한번 새겨지니까 씻기가 참으로 힘들어요. 주변의 시선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을 정도로 위축되는 삶을 살았죠. 길을 가다가 ‘간접적으로’라는 말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랐는데 이제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고향도 가보려고요. 앞으로 꿈이 있다면 몇년째 연구하고 있는 미생물을 이용한 인삼 재배에 성공하고 싶어요.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해야죠. 그게 저로 인해 고초를 겪은 분들에게 용서를 비는 길이기도 하고요.”(양동화) “이번 판결의 사회적 의미도 크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를 옥죄던 족쇄에서 벗어난 게 가장 기쁘죠.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들조차도 그동안 저를 따돌림하거나 농담조로 간첩 운운했거든요. 일일이 반박하거나 설명할 수도 없어서 많이 괴로웠어요. 한반도 평화와 북한 핵문제로 석사와 박사 논문을 쓰는 등 공부를 계속해왔는데 이제 책이나 논문으로 성과물을 열심히 제시하려고 해요. 이론뿐 아니라 온몸으로 겪어봤기에 누구보다 문제 해법을 잘 알거든요. 앞으로 연구자 김성만으로 봐주면 좋겠어요.”(김성만) 보안관찰 거부 투쟁과 겹쳐 재심 신청을 포기했던 강용주 등 구미간첩단 조작 사건의 나머지 피해자들도 곧 재심을 신청할 계획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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