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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는 어떻게 안녕이 될까 : 음악·공연·전시 : 문화 : 뉴스 - 한겨레

[토요판S]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안녕, 모란’

창덕궁 낙선재 모란향 가득한 전시장
비단옷 뒤 꽃 흩날리던 화사한 분위기

복온공주 혼례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복온공주 혼례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들숨에 건강을, 날숨에 재력을”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사람은 하루에 2만번의 호흡을 한다고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마다 건강해지고 부유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귀엽고도 간절한 기원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밥그릇에도 숟가락에도 바늘 쌈지에도 촘촘하게 새겨넣은 수복(壽福)이란 글자. 밥 한술에 건강을, 바느질 한땀마다 재력을 빌었던 셈이다.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길상(吉祥)무늬는 조선 후기 미술과 공예에서 유난히 많이 쓰였다. 이 시기의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장식한 길상들은 현대 명품 브랜드의 모노그램처럼 ‘잘 사는 인생’에 대한 맹렬한 욕망을 투명하게 내보인다. 부자가 되고, 시험엔 찰싹 붙고, 건강하게 오래 살며, 자손은 번창, 부부는 원만. 그리고 길상 중에서도 모란은 특히 사랑받았다. 부귀화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대표적인 부귀영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 모란을 소재로 삼은 국립고궁박물관의 여름 전시 제목은 ‘안녕, 모란’(7월7일~10월31일). 나는 이 제목 한줄에 마음이 끌려 봄부터 전시를 기다렸다. 모란 하면 떠오르는 부귀가 아닌 안녕을 주제로 삼은 이유가 무엇인가 궁금해서였다.
모란 정원.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모란 정원.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향기롭고 다정스러운 감성
‘안녕, 모란’에서는 혼자 알기 아까운 좋은 것들을 남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에너지가 가득 느껴진다. 전시는 비 오는 모란 정원에 발을 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솔숲에서 비를 긋다 우연히 발견한 모란 군락처럼 연출된 이 공간은 그 전체가 포토존이다. 일행에게 ‘여기 서봐’, ‘저기 앉아봐’ 하며 인증샷을 찍는 관람객의 소곤거림이 끊이지 않는다. 옛사람들도 명화를 보게 되면 그림 귀퉁이에 누구누구도 이 그림을 봤노라고 댓글을 달았듯이, 전시를 보면 인증샷을 남기는 것이 현대인의 의례인 것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마스크를 쓰고도 어렴풋하게 모란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벽에 쓰인 단정한 인사말보다도 앞질러 달려드는 이 향기야말로 앞으로 보게 될 수많은 모란들에 대한 강렬한 예고장이다. 이것이 창덕궁 낙선재에 핀 모란 향을 모아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감동했다. 지나간 계절의 꽃향기를 간직했다 안겨다 주는 것을 나는 사랑 아닌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모란 정원 외에도 또 다른 포토존인 모란무늬 그림자가 드리운 방, 미니 게임, 미디어 아트 등 전시 곳곳의 아기자기한 창의들이 관람객을 미소 짓게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모란을 더 풍성하게 보여주기 위해 배치한 미디어들이 오히려 실물이 지닌 아우라를 압도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왕실 혼례복 두벌이 나란히 나온 2부 하이라이트 공간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이곳에는 왕실 혼인식이라는 성대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미디어 아트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배경이어야 할 영상의 명도와 채도가 더 높은 탓에, 세월에 빛바랜 왕실 혼례복은 그 앞에서 풀이 죽고 만다. 창덕궁에서 전해 내려온 활옷이나 복온공주(1818~1832)가 혼례에서 입은 활옷 모두, 가까이 다가가 보면 붉은 비단 가득 놓인 자수 장식을 살펴보느라 발을 뗄 수가 없다. 그러나 도로 몇발짝 물러나면 영상의 선명한 빛이 도드라지며 나와 유물 사이 200년의 격차가 새삼 두텁게 다가온다.
왕의 신주를 모시던 빈 가마와 의자가 놓인 방에 모란 병풍이 둘러쳐져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의 신주를 모시던 빈 가마와 의자가 놓인 방에 모란 병풍이 둘러쳐져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모란도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모란도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의 신주 모시던 가마 놓인 방 ‘반전’
상실에 흔들리지 않는 ‘모란의 안녕’
지금부터의 안녕
이제는 궁금증을 해결할 시간이다. 이 전시는 어떻게 모란이라는 소재를 통해 안녕이라는 주제에 도달하고 있는가. 총 3부로 구성된 전시에서 2부 마지막까지 모란은 계속해서 부귀와 풍요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직전까지 비단옷 뒤로 꽃이 흩날리던 화사한 분위기는 3부에 이르러 극적으로 전환된다. 벽마다 모란 병풍을 둘러친 엄숙한 방에 왕의 신주를 모시던 빈 가마와 의자가 놓여 있다. 궁 밖에서는 혼례 같은 경사로운 자리에 놓이던 모란 장식이 왕실에서는 흉례에도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는 물건들이다. 그런데 장례나 제사에 모란 그림이 쓰였다고 해서 이 꽃에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겼다고 볼 수 있을까. 의궤에 따르면 국상 과정에는 모란 병풍뿐만 아니라 일월오봉병도 함께 쓰였다. 온 나라가 슬픔을 표할 때에도, 떠난 이의 어진이나 신위가 자리한 공간은 생전과 다름없이 화려하고 위엄 있게 장식했던 것이다. 상실의 슬픔을 치러내는 왕실 전통에서 발견되는 이 ‘다름없음’은 그들에게 안녕함이란 어떤 의미였을까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영화로운 꽃들로 채워진 슬픔의 자리에서, 우리는 상실에도 흔들리지 않는 씩씩한 기품을 목격한다. 전시에서는 곧장 눈에 띄지 않는 이 징검돌 하나를 건너 우리는 비로소 모란이 품은 안녕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전시를 보는 내내 ‘안녕, 모란’이란 화두를 따라간 끝에 남는 질문은 모란이 아닌 우리의 안녕에 대한 것이다.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시기이지만, 그래서 과연 무엇이 안녕인가? 지금 우리는 어떻게 안녕해지기를 원하는가? 각자가 각자의 안녕을 구하는 오늘날, 문화재를 바라보며 얻어갈 수 있는 충족감은 이런 것이다. 평소엔 만져본 적 없는 마음의 결을 쓰다듬고, 펼쳐본 적 없는 생각의 쪽을 하나하나 넘겨보게 되는 것. 박물관을 나서는 길에 다시 떠오른 것은 바람에 움직이는 모란을 그린 병풍이었다. 봄볕에 실린 온기가 열기로 변하기 시작할 때 모란은 아주 잠시 피었다 진다. 그러나 커다란 꽃송이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릴 때, 사람은 비로소 큰 꽃은 무겁구나 깨닫고 놀란다. 전염병과 싸우고 버티며 두번의 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으레 누리던 행복 역시 가느다란 가지 끝에 피어 있던 것임을 알게 된 우리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계속 바람 부는 지금이 어쩌면 안녕을 빌기에 더없이 좋은 날들이다. 신지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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