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5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이장 행사
지난 4월 유골 귀국한 정경모 묘역 옆으로
늦봄과 합장된 박용길 10주기 기일에 맞춰
2019년 별세한 유·안순심 부부도 함께 옮겨
1993년 3월 석방된 뒤 함께 경주 여행을 갔을 때 기념사진. 왼쪽부터 유원호·안순심 부부와 문익환·박용길 부부. 사진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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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25일 도쿄와 베이징을 거쳐 평양행 비행기에 오른 문익환(오른쪽) 목사와 정경모(왼쪽) 선생. 사진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제공
통일의 씨앗들, 여기 함께 묻히다’. 지난 1989년 방북길에 동행했던 고 문익환·정경모·유원호 선생을 같은 묘역에 나란히 모신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는 오는 25일 오전 11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문익환·박용길, 유원호·안순심 부부의 묘를 지난 4월 유골로 귀국해 묻힌 정경모 선생의 묘역 옆으로 옮기는 이장행사를 한다. 이로써 냉전과 국가보안법의 쇠사슬을 뚫고 한반도 평화통일 담론의 물꼬를 튼 ‘4·2 남북공동 선언’의 주역 3인이 32년 만에 고국 땅에서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번 이장 행사는 늦봄 문익환의 부인이자 동지인 봄길 박용길의 10주기 기일에 맞췄다. 지난 1994년 1월 별세한 늦봄과 2011년 9월 뒤따른 봄길 부부는 이미 모란공원에 합장되어 있어 함께 자리를 옮기게 된다. 지난 2019년 몇달 사이로 별세한 유원호·안순심 부부는 파주 용미리 묘역에서 모란공원으로 이장한다. 이번 이장을 계기로, 유원호 선생의 방북 동행 동기와 ‘3인의 인연’이 새삼 확인되고 있다. 유 선생은 1989년 4월13일 도쿄를 거쳐 문 목사와 함께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전기획부에 붙잡혔고 곧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공안당국은 그를 ‘북한 공작원’이자 방북을 주선한 주모자로 몰았다. 유 선생은 문 목사와 똑같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4년의 옥살이 끝에 1993년 3월 특별사면되어 늦봄과 함께 석방되었다.
1993년 3월6일 특별가석방된 문익환(왼쪽) 목사와 유원호(오른쪽) 선생이 서울 수유리 늦봄의 집에서 열린 환영모임에 앞서 4년 만의 해후를 기뻐하고 있다. 박용수 사진가 제공
하지만 유 선생은 실제 재판 과정에서 북한의 지령이나 자금을 지원받은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더구나 원래 방북에 합류할 대상도 아니었다. 1930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유 선생은 해방 이후 홀로 월남했고 포병 소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1956년까지 광주 보병학교(상무대)에서 근무한 연고로 1960년 광주시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이듬해 목포 출신인 부인과 결혼하고, 65년에는 조선대 법학과를, 70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1971~72년 광주 지역구인 김녹영 의원(신민당) 비서관을 지낸 뒤 사업을 하던 그는 85년 국회부의장이 된 김 의원의 비설실장으로 돌아왔다. 정계 복귀가 아니라 위암 발병을 한 김 의원의 부탁으로 일본에서 말기 두 달간 직접 간병을 했던 것이다. 문 목사의 맏딸 문영금씨는 16일 “기독교 신자인 유 선생이 김 부의장의 쾌유 기도를 해달라며 부친을 찾아와 첫 대면을 하게 됐다. 일본에 투병할 때도 국제전화로 간절한 기도를 여러 차례 함께 드린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김 의원은 결국 그해 7월 별세했는데 이 무렵부터 유 선생과 정경모 선생의 인연도 시작됐다. 그뒤 1988년 일본 기업과 합작으로 중원엔지니어링을 세우고 자주 일본 출장을 다녔던 유 선생이 정 선생을 통해 방북 계획을 알고 합류하게 된 것이다. 문영금씨는 “앞서 1988년부터 ‘평양행’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던 부친은 큰아들 문호근과 함께 가려고 했으나 일본 비자가 막혀 무산됐다. 워낙 극비리에 추진해야 해서 다른 동행을 구할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유 선생께서 먼저 수행하겠다고 나섰고 만류도 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일본에서 나온 한인사회 잡지 항로>(2021년 3월호)에서 나고야에 있는 NPO법인 삼천리철도의 도상태 이사장이 공개한 증언이 있다. ‘문익환 목사 일행의 방북 사건'이란 제목의 글에서 도 이사장은 “진위 여부는 모르지만 (유원호씨한테) 방북한 이유를 물었더니 ‘이 역사적 행동에 동행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라는 정경모씨의 말에 설득됐다고 했다. 그런데 정경모씨한테 묻자 ‘동행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안 됐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재일 한인사회 잡지 항로> 2021년 3월호 표지. 정경모 선생 유족 정강헌씨 제공
유 선생도 1989년 공판 때 ‘방북’은 누구의 사주나 설득에 따른 것이 아닌 자신의 통일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그는 1989년 7월10일 열린 2차 공판에서 피고인 진술을 통해 “북한을 보는 시각과 가치판단에 따라 반국가단체인지의 여부를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 8월28일 열린 5차 공판의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선생은 “통일은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한국 기독교의 당면과제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북한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유 선생은 방북의 또다른 동기였던 고향 신의주를 찾아가 모교와 압록강 철교 등을 둘러본 사진도 남겼다. 수감 이후 조사과정에서 유 선생의 기록들이 문 목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고 유원호 선생이 1989년 3월31일 해방 이후 떠나온 북녘 고향을 방문해 모교인 신의주청송남자고등중학교를 찾았다. 사진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제공
고 유원호 선생이 1989년 3월31일 고향 신의주를 방문해 압록강 철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제공
그런 소신과 신념을 따른 대가로 옥고를 치렀지만 유 선생은 민주화로 ‘진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름을 드러내려 하거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참전용사임에도 실정법 위반자라는 이유로 호국원에 묻히지도 못했다. 25일 이장 행사는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송경용 신부의 사회로 진행한다. 김형수 시인이 추도시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평화의나무합창단이 추모의 노래를 올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모란공원 사람들, 세진음향(대표 임윤호)에서 후원한다. 참가 신청은 구글폼
통일의 씨앗들, 여기 함께 묻히다 문익환, 박용길, 유원호, 안순심 모란공원 이장 행사 (google.com) 또는 (02)902-1623. 후원 계좌(우리 1005-003-075342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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